글쓴이 : binnal
출처
http://www.cine21.com/Community/Netizen_Review/review_read.php?no=49717
실화를 영화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소박한 사실에 기초한다고만은 할 수 없다. 만드는 사람들은,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완강한 실재의 장벽 앞에 서 있다. 영화나 소설 속의 인물들은 언제나 실제 인물 그대로가 아닌, 작자나 감독에 의해 재해석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창조된 인물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실재의 벽과 어떻게 대결하느냐, 이 장애물을 어떻게 넘어서느냐, 하는 것이 실화 영화를 일반 극영화와 구분짓는 경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 테크닉이 실화 영화를 실화 영화답게 만든다. 일반 극영화가 100미터 경기라면, 실화 영화는 허들 경기다. 허들에는 허들의 규칙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처럼 독하고 사나운 영화이기를 바랐다. 이 바람은 대체로 윤종찬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소름] 같은 영화를 만든 사람은, 거대자본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여성이자 조선인이라는 이중의 소수자로서, 그 장애를 다수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극복하려고 했던 박경원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대치이기도 했다. 나는 이 사람이 그저 단순한 회색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기가 타고난 소수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맨 앞자리의 사람들은, 어쩔수없이 그 소수성을 떨치고 다수에 편입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것조차 아주 독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독립운동만 독한 마음을 가져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터뷰를 읽어보니 감독의 의도도 대충 그러했던 것 같고. 박경원에 대한 친일 논란은, 이미 영화 안에 다 포함되어 있는, 그래서 이런 논란 자체가 어떤 히스테리를 반증하는, 그런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영화는 이 논란에 대해 그다지 결백하거나 초연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대체로 그것은, 허들의 규칙을 위반한 데서 온 것이라 생각한다.
박경원의 이력은 의외로 알려진 게 많았다. 일본에서는 [박경원 평전]도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극의 장보고나 연개소문처럼 몇 가지 문장에서 기초해서 아무렇게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경우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 인물의 면모를 보이는데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지울 수는 있다. 하지만 지운 자리를 다른 것으로 덮어서는 안 된다. 실존 인물의 삶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래야 한다. 박경원에 대한 ‘사실’에는, 고이즈미라는 노친네 장관과의 염문도 있고 신사참배도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사실을, 만들어낸 허구로 덮어버린다. 한지혁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나오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어차피 세세한 디테일들은 상상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로맨스만큼 좋은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한지혁은 빈 공간을 채우는 자로서 가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있었던 것을 삭제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조선적색단 사건이라는 엄청난 암살 사건이 터지고, 한지혁이 억울하게 연루되고, 연인인 박경원도 억울하게 연루되고, 고문당하고, 하늘에 대한 열망은 죽은 연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변질된다. 실제로 이 굵직한 연쇄가 이어지는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은, 자기 소유의 비행기를 가지기 위해, 그리고 장거리 비행을 위해, 조선이고 나바리고 애인이고 뭐고 개의치 않고 노친네와 동침까지 할 수 있는 표독함이다. 이 사람을 망설이고 갈등하는 그저 그런 회색인으로 만들고 연인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박함으로 가득하게 만든 것은 허구적 상상력이 아니라 사실의 왜곡이고, 또 100억 제작비에 해당하는 관객 머리수와의 타협 때문일 거다.
‘실존인물의 영화화’를 표방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척박한 시대에 비행사가 되고자 했던 한 신여성의 이야기라고 하면, 그냥 그대로 수긍할 수 있으니까. 한지혁이라는 남자의 존재감도 그 시대에 있었을 법한 사람으로서 상당히 그럴 듯 하고. [말아톤]이 배형진 씨를 모델로 했음을 명백하게 하면서도 초원이와 초원이 엄마의 가공성을 내세워 사실로부터 마음껏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영화도 박경원을 모델로 해서 그냥 다른 이름을 가진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웠다면, 조선적색단이 나오든 독립투사가 나오든 뭔 짓을 해도 상관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여기서 또 문제되는 게 있다면, 그럴 경우 ‘조선 최초의 민간 여류 비행사’라는 거창한 마케팅 포인트가 없어진다는 거다. 100억을 뽑으려면, 실화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리 저리 생각을 해보다가 내가 내리는 결론은, 이 사람의 삶을 블록버스터로 영화화하는 것은 부적절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 스타일을 표독하게 밀고나가자니 대중적 감성과 배치되고, 둥글둥글한 스타일의 극영화로 만든다면 홍보 효과를 낼 수 없고. 이 때문에 사실과 허구 사이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제국주의의 치어걸을 미화했다는 비판에서 완전히 결백할 수 없고. 그러다보니 어떤 ‘광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영화 안보기 운동까지 벌리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옭죄는 그물에 걸려든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또 그 아찔한 비행 장면들, 1930년대 일본의 거리들을, 대자본이 아니면 어떻게 찍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 사실이라는 허들을 어떻게 잘 넘어서서 영화를 만드는가 만큼, 대자본이라는 허들을 어떻게 현명하게 요리하며 영화를 만드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과 많은 말들을 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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