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라니 믿겠다만....★★★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우연히 부딪친 이성이 평소 염원하던 이상형인데다, 우연히 발생한 사건으로 사귀게 된다는 설정은 많은 청춘남녀의 로망이다. 비록 우연이라는 요소가 겹쳐 발생해야 한다는 낮은 확률에도 불구하고. 2004년 일본의 한 인터넷 게시판에 어떤 사연 하나가 올라온다. 그리고 그 사연은 급속도로 퍼져나가 책과 만화로 출간되었으며, 급기야 영화와 TV 드라마로도 상영된다. 바로 <전차남>의 이야기다.
다듬은 지 오래된 것 같은 긴 머리, 두꺼운 안경, 촌스런 패션에 어눌한 말투로 왕따 신세에, 22년간 여자를 한 번도 사겨본 적 없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에 빠져 사는, 즉 오타쿠인 전차남(야마다 다카유키)은 지하철 안에서 취객에게 시달리는 여성(나카타니 미키)을 얼떨결에 구해준 뒤 그녀로부터 ‘에르메스’ 찻잔 세트를 선물로 받는다. 여성과 사겨본 경험이 전무한 전차남은 커뮤니티 사이트에 조언을 구하게 되고, 방 안에서 틀어 박혀 사는 젊은 청년, 헤어진 애인을 잊지 못하는 간호사, 만화방에서 죽치고 만화책이나 보는 삼인방, 한 집 살면서도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젊은 신혼부부 등이 전차남에게 데이트 코치를 하기 시작하고(누가 누구에게?), 네티즌의 응원을 받은 전차남이 에르메스와의 로맨스에 성공한다는 게 영화 <전차남>의 전체 스토리다.
일본 전체를 뒤흔든 실화라니 믿기야 하겠지만, 맨 앞에서 얘기했듯이 로망이라 함은 일종의 판타지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실화라기보다는 판타지에 좀 더 가까운 듯 보인다. 특히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는 에르메스 찻잔을 ‘싼 값에 구입했다’며 선물을 하기도 하고, 꽤 비싸 보이는 일식집을 자주 이용한다고 하며, 실제 사는 집도 도쿄의 현실에 비춰보면 거대한 저택인 에르메스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오타쿠인 전차남을 왜 좋아하는 것인지 판타지가 아니고서는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에르메스는 ‘이래서 내가 남자가 없나봐’라고 푸념하지만, 그런 푸념에 동의하기도 쉽지 않다. 돈도 많고, 지적이며, 정갈하고, 심지어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세심한 그런 여성이 어디 흔한가 말이다. 많은 남성이 에르메스에게 고가의 선물을 한 반면, 전차남은 소박한 선물(각설탕 쌓기와 같은?)만 해서 거기에 감동 받았나? 만약 그렇다면 이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연예인과 사귀는 법’에 버금갈 만큼 코미디다.
게다가 전차남과 에르메스의 캐릭터는 거의 고정되어 있어서 과연 둘의 로맨스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부터가 좀 의문이다. 극도로 소심한 오타쿠인 전차남은 컴퓨터라든가 <매트릭스>와 같은 영화 얘기를 할 때만 달변이고(그것도 상대는 별로 배려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편안하게 상대와 마주하지 못한다.(편하게 만나지 못하는 관계가 오래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항상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눅 들고 어눌한 말투로 두 번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사회성이 결여된 전차남의 스타일은 코믹한 상황을 연출하기는 하지만 로맨스의 상대자로선 애처롭고 짜증날 뿐이다. 반면 에르메스는 반대로 시종일관 정갈하고 우아하다. 그런데 처음부터 전차남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그런 마음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변치 않는다. 즉, 둘이 서로를 좋아하고 사랑하면서 서로에게 영향 받아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최소한 에르메스는 변화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랑이라??? 이런 것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
반면 이 둘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 네티즌들은 실제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톡톡 튄다. 화면 가득 흘러가는 인터넷 용어들이 정겹고(?) 사실 알고 보면 전차남에게 조언할 자격이 안 되는 이들 키보드 워리어들이야말로 컴퓨터로 소통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리얼이자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전차남과 에르메스의 로맨스보다는 네티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영화 <전차남>은 더 빛을 낸다.
최근 언론기사에 의하면 미국 뉴욕에서 한 남자가 우연히 전철에서 마주친 이상형의 여성에 대한 글을 올렸고, 수많은 네티즌들이 나서서 여성을 수배(?), 신문과 TV에까지 사연이 소개되면서 결국 사귀게 되었지만 6개월 만에 연인관계를 끝내고 친구로 남기로 했다고 한다. <전차남>의 로맨스가 이 기사 내용대로 끝날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건 왜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