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femmes, 인간은 진실을 견딜 수 있는가>
* 이 글은,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여덟명의 여인들>의 리뷰입니다. 스포일러가 처음부터 잔뜩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여덟명의 여인들>을 코미디 영화로 봤다는 이야기를 했다. ‘재미 있는’영화였다고 한다. 그 말에 충격을 받아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절대로 웃을 수 없었으니까. 이 영화는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고발과 훈계를 버무린 어떤 것에 가깝다. 사랑과 인간관계에 대한 모든 가식, 모든 위선이 사라진다고 가정해보자. 영화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진실을 목도한 당신은, ‘과연 그것을 버틸 수 있겠는가?’. 두번째로, 버틴다면 어떻게 버텨야 할 것인가?
우선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정리해보자. 등장인물은 모두 여덟명이다.(마르셀이 빠져있으나 그 이유는 이 글의 끝에 이야기하겠다.) 까뜨린느, 쉬종, ‘할머니’, 피에레트, 샤넬, 갸비, 오귀스띤, 루이즈. 까뜨린느와 쉬종은 갸비의 딸들이다. 갸비는 마르셀의 아내로 노처녀 오귀스띤과 자매다. 할머니는 갸비와 오귀스띤의 어머니(곧 마르셀의 장모)다. 피에레트는 마르셀의 여자형제(여동생인지 누나인지 잘 모르겠다)다. 마지막으로 샤넬과 루이즈는 집의 메이드다.
이야기의 시작은 자신의 방에서 시체로 발견된 마르셀이다. 폭설과 ‘누군가’가 끊어놓은 전화선탓에 집은 완전히 고립되고, 그 집에 있는 8명의 여인들 전원이 용의자가 된다. 그들은 서로서로를 의심하며 마르셀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극을 벌인다, 는 것이 <여덟명의 여인들>홍보문구에 씌인 내용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마르셀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모든것은 집안의 막내 까뜨린느가 ‘불쌍한 아버지’앞에 모든 여인들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그러나 결국 그녀의 목적도 ‘아버지의 유일한 여인’이 되는 것일 뿐이다.)꾸민 계략이었다. 그 계략 탓에 드러난 ‘진실’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 집안이 어디까지 콩가루인지 한번 살펴보자. 성실한 대학생인줄 알았던 쉬종은 임신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들통나서 갸비를 거의 기절시켰고, 할머니는 사실 자신의 남편을 독살시킨 이력이 있다. 까뜨린느와 쉬종은 사실 아버지가 서로 달랐고, 할머니는 마르셀과 채권관계가 얽혀있다. 피에레트는 마르셀에 대해 근친상간적인 애정과 증오가 섞여있었고, 마르셀의 사업을 말아먹은 ‘동업자’를 위해 그에게서 50만프랑이라는 거금을 뜯어냈다. 그 ‘동업자’는 사실 마르셀과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였던 갸비의 애인이기도 했으며, 루이즈는 갸비를 좋아하는 동성애자였다. 샤넬은 피에레트를 좋아하는 동성애자였다! 모든 거짓이 폭로된 뒤, ‘아버지의 유일한 여인은 바로 나’임을 주장하며 사랑하는 아버지의 방을 열어젖히는 까뜨린느. 그러나 그녀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 진짜로 죽게 되는 마르셀의 모습일 뿐이다. 그의 선택은 권총자살이었다.
첫번째 질문이 이 마르셀의 자살씬에서, 관객들에게 ‘강제된다’. 질문을 다시한번 적어보자면, 진실을 목도한 당신(관객)은, ‘과연 그것을 버틸 수 있겠는가’이다. 왜 감독은 굳이 추리극을 빙자한 것일까? 이 추리극은 결코 흥미진진함을 유발시키지는 않는다(오히려 지루할 정도다), 추리극은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속에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관객은 첫장면에서 티격태격하면서도 꽤 다정해보이는 7명의 가족을 본다.(아직 피에레트가 등장하기 전이니까). 밝게 웃으며 서로를 끌어안는 자매를 보고, 심술궂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동생과 기품있는 언니라는 또다른 자매를 보고, 생활력있는 하녀와 인자한 할머니를 보게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씩 하나씩 깨져나가다, 종국에는 모두 환상이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이것이 추리극이기 때문에 좋든 싫든 그 과정모두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버틸 수 있는가?’란 질문이 왜 성립하는지는 충분히 설명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당신’이라는 관객에게로 돌아가는 이유와 그것이 ‘강제되는’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마르셀이라는 등장인물아닌 등장인물의 존재가 곧 관객이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을 마르셀을 뺀 8명으로 친 이유는, 마르셀이 관객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보자면, 마르셀은 줄곧 ‘등장인물 인 척’하다가, 영화의 마지막 진실을 관객앞에 털어놓는다. 바로 ‘까뜨린느의 입’을 통해서. “아빠는 이 문뒤에 팔팔하게 살아있어요. 아빠는 결코 당신들이 털어놓은 말들을 잊지 않을거에요.” 까뜨린느가 영화의 후반부, 마르셀의 문을 열기 전에 외치는 대사다. 마르셀은 자신의 방 안에서 (자신의 부재중에 일어난)집안의 모든 대화를 들었다. 마르셀을 정말로 리얼한 등장인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가능, 억지이고 영화의 옥의 티가 될 뿐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대사가 마르셀은 등장인물이 아니라 관객자신이라는 증거라면 어떨까? 증거는 그 말고도 많다. 그 외의 증거 첫째, 모든것을 듣고 있는 설정인 그가 단 한번이라도 얼굴을 드러내는가? - 한 번도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얼굴이 나와도 상관없을 후반부 까뜨린느의 회상씬에서조차 마치 일부러 얼굴을 찍지 않은 듯 마르셀은 뒷모습만 나올 뿐이다. 딱 한명 영화상영 도중 마르셀의 얼굴을 본 예외가 있다. 그녀가 샤넬이었다. 샤넬이 극의 진행도중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퇴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룰을 어겼기 때문이다 - 영화의 등장인물이 감히 관객을 보다니. 그 외의 증거 두번째, 마르셀은 <8명의 여인들>에서 유일하게 노래를 못한 등장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노래란, 소통의 수단이자 진실이 드러나는 장이다. 아직 피에레트에 의해 까발려지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수상한 사랑의 오오라를 풍겼던 오귀스띤의 노래를 보라, 발랄해 보이는 초반부 장면에서 이미 결말의 비극을 누설하고 있는 까뜨린느의 노래를 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에 다루겠지만 ‘할머니의 노래’를 보라. 이 모든 단서들은 마르셀은 등장인물이 아니라 관객임을 역설하고 있다. 마르셀의 방문이 열리고 그의 뒷모습 - 그는 관객을 등지고 서있다, 즉 관객의 시선으로 등장인물인 까뜨린느를 바라본다 - 이 비칠때, 그 짧은 순간 관객은 마르셀과 ‘충격적으로’ 합체한다.(계속 아닌척 했으니 이 아니 충격적일소냐) 그 다음장면으로 넘어가는 1초가 관객에게 있어서 판단의 시간이다. 마르셀이 관객이 되었으니 곧 관객은 마르셀이 되었다. ‘자,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1초사이에 자살을 결심한 관객이 아니라면, 일단 고비는 넘겼다. 마르셀의 권총이 관자놀이에 맞춰지고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리고 관객이 그 1초사이에 자살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마르셀은 처음으로 등장인물이 된다. 관객과의 합일이 깨지는 순간이자, 1초간 강제된 ‘절체절명의 판단의 순간’이 지나가버리고 관객은 감독이 묻는 ‘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살아남은 당신은, 이제 어떻게 버틸 것인가?’
쓰러지듯 주저앉은 까뜨린느를 감싸고, 엔딩곡인 ‘할머니의 노래’, Il n'y a pas d'amours heureux(행복한 사랑은 없네)가 시작된다. 그리고 8명의 여인들이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춤을추다가, 이윽고 나란히 늘어서서 한명씩 옆사람의 손을 잡기 시작한다. 루이즈가 자신을 경멸하는 갸비의 손을 잡고, 갸비가 사랑의 라이벌이었던 피에레트의 손을 잡고, 피에레트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할머니가 까뜨린느의 손을 잡고, 까뜨린느가 자신을 어른으로 봐주지 않는 ‘증오스런’(이것이 진실이다.)언니의 손을 잡고, 까뜨린느가 싸가지 없는 오귀스띤의 손을 잡고, 오귀스띤이 샤넬의 손을 잡는다. 단순한 연극 무대인사 흉내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인간관계의 환상이 깨진 뒤 그래도 인간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인간뿐’이라는 감독의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기독교식으로 ‘적의’를 말살한 것이 아니라 ‘적의’를 그대로 인정하되 승화시킨 것이다. 서로 알 것 다 알고, 대놓고 미워하고 싸우던 이들이 마지막에가서 서로의 손을 움켜잡음으로써 초반의 거짓 안정이아니라 후반의 진짜 안정, 진짜 사랑, 진짜 인간관계를 얻는다. - 역설적으로 그것은 언제나 불안하고 전투중인 인간관계다. 그 끔찍했던 ‘진행과정’에서, 관객들이 본 싸움들을 하나하나 돌이켜보자. 까뜨린느와 쉬종은 왜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싸우게 되었던가?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언니는 동생을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이에서 벗어나고 싶은 동생은 언니를 증오한다. 그 과정에서 자매간의 우애는, 아니 우애라는 환상은 박살나고 숨겨져 있던 진실이 드러난다. 예컨대 그녀들의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 다음으로 갸비와 오귀스틴의 다툼은 어땠는가, 이 둘은 거꾸로다. 처음부터 대놓고 치고받고 싸우더니, 할머니의 진실, 즉 남편독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진 뒤에야 둘의 관계가 회복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극적인 다툼으로 갸비와 피에레트의 다툼이 있다. 여기 모든 메시지가 응축되 있다. 서로를 이해하는 듯한 뉘앙스로 시작된 대화가, 둘이 같은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드러났을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방바닥을 뒹굴면서 서로 죽일듯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 결과는? - 각각 자신들을 사랑하는 동성애자인 루이즈와 샤넬을 경멸했던 이들이 격렬하게 키스를 나눈다. 진짜 사랑, 진짜 인간관계란 언제나 불안하고 전투중인 관계일수밖에 없다. 여기서 할머니의 대사인 ‘평생 결점한번 없었어, 그런 사람과 내 평생을 살아?’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들 부부에게는 까뜨린느가 없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할머니가 까뜨린느를 안고 노래할까. 단지 모든순서가 지나고 그녀만 남았기 때문일까? - 아니다. 오히려 할머니의 순서가 가장 먼저 정해졌다고 확신한다, 위와같은 이유로.
‘할머니의 노래’인 <Il n'y a pas d'amours heureux>가 이 영화의 마무리곡이다. ‘행복한 사랑은 없네’가 제목이며, 노래가사도 사실 그 구절의 반복이다. 다만 이 노래는 본래 루이 아라공의 동제목의 시에 죠르쥬 브라상이 곡조를 붙인것인데, 그 과정에서 시의 마지막 부분이 빠져있다. 그 구절이야말로 위와같은 <8명의 여인들>해석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Il n'y a pas d'amour heureux
Mais c'est notre amour a tous deux
(행복한 사랑은 없어요. 하지만 이것만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랑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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