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없기 때문일까? 노력을 안 했기 때문일까?..★★★
때는 도쿄 올림픽 개최 한 해 전인 1963년. 일본 전역은 아마도 발전과 성공의 흥분으로 들떠있었으리라. 그런데 성공과는 거리가 먼 젊은이 넷이 도쿄의 허름한 한 칸짜리 방에서 빈둥거리며 기거한다. 잘은 모르지만 이 네 명과 열심히 일하는 청년 역인 유지 등 다섯 명은 일본의 유명한 하이틴 스타라고 한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청춘스타들을 곧잘 영화에 출연시키고는 한다. 그게 흥행을 위해서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감독의 여러 인터뷰에 담긴 내용을 보면 동시대의 가장 선망이 되는 젊음을 화면에 담는 걸 즐기는 듯도 하다. 마치 이 화면에 담긴 얼굴이 그 시대의 표상이라는 듯이.
얼핏 보면 이 영화는 잘 나가는 하이틴 스타를 활용, 그들 한 명 한 명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 관객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일종의 기획 상품이라 생각되어지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누도 잇신 감독은 여전히 사회의 소외된 삶, 마이너 삶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대상은 다양하다. 이전의 영화에서 그 대상은 노인(<금발의 초원>), 장애인(<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또는 동성애자(<메종 드 히미코>)였다면, <황색눈물>에선 재능 없이 그저 꿈만 간직하고 있는 젊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과정은 매우 미숙해 보인다. 뚜렷한 개연성 없이 무리하게 작은 방으로 몰아넣는다. 그 당시의 일본은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또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문화적 차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들이 모이는 과정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감독의 인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만화, 그림, 노래, 소설 등 예술의 각 분야에 꿈을 가지고 있는 자칭 예술가 집단은 오로지 만화를 그리는 에이스케로 인해 삶의 영위가 가능한 상황을 맞는다.
실제로 한 명이 벌어서 네 명이 생활한다면 돈을 벌어오는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게 마련이다. 거기에 처음부터 이들이 살고 있는 한 칸의 방마저 그 만화가의 것이라면 애당초 평등한 조건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누도 잇신 감독은 그런 자본주의적 권력 관계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그건 서로의 우의로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고 믿는 듯하다. 그게 순진한 건지 아니면 감독의 신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실에는 존재할 것 같지 않는 마치 만화 속 세상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만화가만이 예술로서 성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이들이 겪는 현실의 비참함도 그다지 참혹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헐벗고 굶주린 풍경이 고작 그 정도일까. 그리고 이들은 꿈만 있을 뿐 꿈을 실현하기 위한 치열함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예술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재능 없음일까? 아니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영화는 이들이 재능이 없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재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노력이라면 별로 성공했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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