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샘 역을 맡은 피어스 브로스넌 말대로 <맘마미아>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바의 노래들이다. 1999년 런던의 프린스 에드워드 극장에서 초연을 시작한 이래 전 세계 160여 개 도시에서 공연된 바 있는 뮤지컬 <맘마미아>는 순전히 아바의 노래만으로 스토리부터 모든 게 만들어진 유쾌한 소동극이다.
영화에 나온 모든 노래의 주인공 ABBA. 대부분의 386들은 아바의 노래를 접하며 처음 팝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 수학과를 다녀도 더하기 빼기를 무시할 수 없듯이 팝 음악에서 아바는 더하기 빼기와 같은 존재였다. 요즘은 많이 변했겠지만, 예전 라디오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를 뽑으면 아바와 그들의 노래가 거의 최상위권에 위치하곤 했었다. 아바와 함께 Smokie와 Queen. 사실 아바는 거의 모든 노래가 히트곡이라고 할 정도로 히트곡이 많다. 제목은 몰라도 들어보면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음직한 노래들. 한 가수의 노래만으로, 그것도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들어봤을 히트곡으로 뮤지컬을 만들 수 있는 가수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바의 힘이며, 영화 <맘마미아>의 매력이다.
원작 뮤지컬 <맘마미아>를 봤던 사람이라면 더 없이 반가울 영화 <맘마미아>는 사실상 뮤지컬의 스토리부터 노래 리스트까지 거의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물론 단순했던 뮤지컬 세트에 비해 그리스의 섬에서 촬영된 영화는 멋진 바다 풍경 그 자체만으로도 드라마틱한 정서를 불어 넣는다. 재밌는 건 한국 배우들로 공연된 뮤지컬에서 도나의 친구인 타냐역을 전수경이 맡았었는데, 이번 영화에서 그 역을 맡은 크리스틴 바란스키의 이미지가 전수경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타냐의 이미지는 비슷하게 그려지는 것 같다. 아무튼 영화 <맘마미아>가 뮤지컬과 거의 흡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면 원작 뮤지컬의 연출가인 필리다 로이드부터 작가 캐서린 존슨, 그리고 프로듀서인 주디 크레이머까지 뮤지컬 제작에 가장 핵심이었던 여성 3인방이 영화 제작에도 그대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맘마미아>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유쾌함이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리스 비극’에 가까울 수도 있는 얘기가 전혀 비극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영화는 시종일관 흥겹고 유쾌하며 나도 모르게 노래에 발장단을 맞추게 된다. 물론 영화의 유쾌함은 거의 전적으로 아바 노래의 유쾌함에서 직접적으로 분출된다. 화면을 지우고 그냥 아바 노래만 틀어놔도 유쾌한데 거기에 지중해의 기막힌 풍경과 멋진 배우들의 연기까지 곁들여지니 말 그대로 일타 삼피, 사피의 경지가 느껴진다.
영화를 본 누구나 메릴 스트립의 연기에 대해 얘기하는 건 너무 당연하다. 직접 노래와 춤을 소화하며 마치 어린 소녀 같은 싱글맘 도나를 연기한 메릴 스트립을 보면 정말 나이를 근사하게 먹는 게 어떠하다는 걸 그대로 증명하는 것 같다. 거기에 도나의 옛 연인을 연기한 피어스 브로스넌, 콜린 퍼스,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3인 3색의 매력을 뽐내고, 특히 소피를 연기한 아만다 시프리드의 상큼한 매력이 화면을 적신다. 영화를 보면 정말 깨물어 주고 싶을(같이 봤던 사람에게 이 얘기했다가 거의 변태로 몰림 -,-;;) 정도로 예쁜 아만다 시프리드는 린제이 로한 주연의 <퀸카가 살아남는 법>에 출연했다고 하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아마도 같이 뭉쳐다니는 일행 중 한 명이었겠지) 그녀는 오디션에서 <I have a dream>을 멋들어지게 불러 바로 그 자리에서 발탁되었다고 한다.
영화 <맘마미아>는 유쾌함과 함께 여성성이 흘러넘치며 여성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영화다. 아마도 뮤지컬과 영화의 제작을 맡은 핵심 3인방이 모두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이런 분위기는 <Dancing Queen>에서 가사에서 벗어난 여성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으며, <Slipping Through My Fingers>에서 결혼을 앞둔 딸을 둔 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Slipping Through My Fingers>가 나오는 부분에서 얼마 뒤에 결혼을 앞둔 여성이 거의 주체 못할 정도로 우는 바람에 좀 난처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집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안고서 또 한 번 펑펑 울었을 듯.
여성 영화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3명의 아빠 후보를 내세운 기본 설정에 있다. 뮤지컬을 봤을 때도 느꼈는데, 3명의 아빠 후보를 내세운 건 뮤지컬 또는 영화에 하나의 모계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장치라고 보인다. 인류의 초창기, 원시공산제 시절의 결혼제도는 다부다처제였다. 하나의 가족단위에 속해 있는 아이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성인 남성은 아버지요, 모든 성인 여성은 어머니였다. 그런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남성이 아버지인 건 맞는데, 어머니는 특정될 수 있다. 즉, 나를 낳아준 어머니는 정확히 알 수 있는데,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는 것이다. 이래서 당시 사회는 자연스럽게 여성 우위의 모계사회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도 어머니가 도나인 것은 확실한데 아버지는 3명 중에 누구인지 특정 지을 수 없다. 그래서 남성 3명은 각자가 ⅓의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고 나선다. 물론 간단하게는 혈액검사, 복잡하게는 DNA 검사를 하면 누가 아버지인지 정확히 밝혀지겠지만, 영화는 현명(!)하게도 그런 과학적 규명을 거부한다. 아버지가 특정 지워지는 순간, 권력은 남성에게 이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누구의 소유인지 확인하고픈 남성성과 구별하지 않고 포용하려는 여성성의 충돌. 다부다처제에서 일부다처제로의 변화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여성이 당한 역사적인 첫 패배였다.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은 영화의 결론은 여성의 역사적 패배를 최소한 영화에서 만큼은 반복하지 않겠다는 여성 감독, 여성 작가, 여성 제작자의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