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트
인간은 안개 속에서 얼마나 합리적이 될 수 있는가?
모든 경제학의 이론은 인간을 합리적이라고 가정한다. 다시 말해 경제학은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이문에 밝은 사람을 합리적이라고 이름 짓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조카에게 주는 최소한의 수고비조차 아까워 망설이는 구두쇠의 대명사 스크루지 영감이나 식솔을 이끌고 밥 한 끼 구걸하는 동생을 매몰차게 쫒아내는 놀부가 대표적인 합리적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이야기의 끝자락에는 개과천선하여 비합리적 인간이 되어버리는 과오를 범하는데 이유는 일종의 심적 쇼크에 있다. 유령이 보여주는 자신의 미래에 충격을 받은 스크루지 영감이나 도깨비의 몽둥이질에 굴복한 놀부는 결국은 상황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상황의 변화는 우리를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게도 하고 불가능 하게도 한다. 경제학의 가정은 가정일 뿐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사고방식을 강요하거나 그런 가정이 현실의 유동적 상황 변화 속에서 일정하게 적용되어짐을 의미 하지는 못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자의로 또는 타의로 인해 매순간 선택이라는 불가피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고 우리의 선택은 개인차는 있겠지만 우리가 공유하는 법, 규범, 문화적 수준의 합의에 맞게 합리적 수준의 범위에서 결정되어 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내린 결정이라 하더라도 항상 애초에 의도하였던 바람직한 결과로 귀결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이 발행되어 유통되다 내 손에 쥐어진 동전처럼 우연성에 기초하였음을 보여주는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우리가 수없이 거듭하는 합리적인 판단 또한 상황적 변수들로 인해 항상 바람직한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은 합리적 비합리적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 즉 안개 속에 눈이 멀어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과 같다.
인간은 나약하다.
“세상은 쓰레기통이야 그럼 나는 쓰레기네” 자신을 쓰레기라 외친 이 염세적인 신해철의 일갈은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묘한 쾌감을 주었다. 일종의 자기부정이랄까? 아님 세상이 쓰레기통임을 알아버린 중학생의 용기 없는 안도였을까?
대자연의 위대함을 존중하지 않는 인간의 오만은 이미 건너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버렸다.
2004년 인도네시아를 쓸어버린 절망적인 해일은 대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준 분노였다. 산더미 같은 물보라를 목전에 두고 인간은 어떤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조금 덜 고통스럽게 죽는 방법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쇼생크 탈출, 그린마일 등으로 유명한 프랭크 다라본트가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은 미스트는 인간 본성의 여러 가지 단면을 비추고 있다. 정체모를 안개에 뒤덮여 마을의 작은 마트에 모여든 군중은 난생 처음 보는 괴물들에 의해 포위당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합리적인 인간이라 믿는 변호사는 자신이 믿는 이상의 것을 부정하고 현실에 대항한다.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 받아들이는 광신도는 사람들을 선동하고 마트 안에서 신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생존에 대한 강한 열망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 가득한 한 가련한 남자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모든 것에 애착을 갖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이 정의로운 남자에게 연민을 느끼며 그의 무사귀한을 바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그 또한 나약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쓰레기통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쓰레기임을 거부할 수 없듯이 대자연 속에서 인간은 나약한 개체일 뿐이다. 가련한 주인공이 영화 내내 보여주는 정의롭고 합리적이며 때로는 비합리적이기에 아름다웠던 선택과 행동들은 어쩌면 선량한 사람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긴 여정의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4발의 총알은 그에게 또 한 번의 선택을 강요한다.
결국 그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으나 살아남은 것이 아닌 그의 생존이 우연의 일치인지 합리적 선택의 결과인지는 앞으로 남은 그의 고통스런 선택의 순간들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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