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점프를 하다>의 인우와 태희는 어렵사리 재회한 사랑이 다시금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자 극단적인 선택을한다. <혈의 누>의 원규는 아버지의 업보에 대한 되물림과 그 죄책감을 바다에 슬쩍 구겨버리고 만다. 그러나 <가을로>는 감독의 전작들보다 한 걸음 나아간다. 현우와 세진은 여행의 끝에서 더 이상 자신의 죄책감을 은폐하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걸 고백하고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아직은 여전히 아프지만 사막같은 마음에도 희망이 피어날 수 있음을 <가을로>는 이야기한다.
사실 <가을로>는 영화를 재미있게 즐기고 싶은 관객이 보기에는 그 기승전결이 약해 큰 감흥을 주기에는 무리가 있고, 눈치 빠른 관객이 보기에는 영화 시작부터 과정과 결말이 눈에 뻔히 보여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
게다가 감독은 너무 많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우를 범했다. 조금만 덜 보여주고 들려주었더라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해 훨씬 긴박해 질 수 있던 장면이 노출 수위가 절적하지 못한 탓에 뉴스의 보도자료마냥 평이해졌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영화는 충분히 관객의 해석이 가능한 장면에 굳이 설명적 대사를 넣어 오히려 관객의 영화보는 재미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가을로>는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에 주목할 줄 아는 영화이다. 삼풍 백화점 붕괴는 사회적 슬픔이요 고통이다. 슬픔과 고통 뒤에는 후유증이 따른다. 현우와 세진은 나름의 방식으로 후유증을 겪었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내 일이 아니라고, 내 가족의 일이 아니라고 벌써 그 사건을 잊은 것은 아닐까?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픔을 직시해야 한다. <가을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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