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찬란저질잔혹 무비, B급 감성의 절정....★★★★☆
<플래닛 테러>는 이 시대의 장난꾸러기 또는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와 로버트 로드리게즈, 두 감독이 공동 연출한 <그라인드하우스> 중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 연출 부분이다. 미국에서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연출한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가 <그라인드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같이 개봉했으며, 두 영화 사이에 4편의 가짜 예고편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압박 때문인지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는 두 편이 별도 개봉되었고, 4편의 예고편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번 극장 개봉 이전에 한국 개봉이 힘들 것이란 얘기가 나돌아 어둠의 경로를 통해 사전 감상하긴 했다. 나로선 두 번째 관람인 셈인데, 이 정도 영화라면 두 세 번 보는 게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 영화의 감상평을 짧게 요약하자면, <미치겠다! 돌아버리겠다! 죽인다.. 죽여....!!!> 한국 관람 문화에서는 힘들겠지만, 이런 영화는 정말 소리 지르고 휘파람을 불며 발을 구르고 봐야 제 맛이 나는, 그런 영화다.
<그라인드하우스>는 19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동시상영관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들은 주로는 소규모 자본으로 완성한 B급 영화들로, 섹스, 폭력을 중심으로 금기시되던 소재들의 영화였다고 한다. 워낙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보니, 스토리가 건너뛰고, 필름의 색깔톤이 변하며, 필름의 손상에 의한 생략도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그라인드하우스>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한 때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던 동시 상영관이 분위기만으로는 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동네마다 있었던 한국의 동시상영관은 정식 개봉했던 작품들이긴 하지만, 개봉관에선 환영 받지 못했던 영화들이 주로 상영되고는 했다. 역시 섹스, 폭력이 중심이긴 했는데, 좀 어처구니없었던 건 두 편을 동시 상영하다 보니, 가족영화와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가 동시 상영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쿵푸 팬더>와 <플래닛 테러>가 연속으로 상영되는 꼴이랄까. 그러다보니 어린 나의 경우에도 <취권>같은 영화를 보러 갔다가 <별들의 고향>같은 영화까지 보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얼마나 낯부끄럽든지. 하여튼 우리의 동시 상영관도 화면엔 비와 구름이 내리고, 가끔은 전원이 나가 상영이 중단되기도 했으며, 중간에 필름이 사라져 갑자기 이야기가 건너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플래닛 테러>가 시작되기 직전, 영화에는 사전 경고의 자막이 뜬다. 대충 ‘화질이 좋지 않고, 끊어지며, 톤이 맞지 않고... 이런 건 사고가 아니라 감독의 의도다’... 그러니 잔말 말고 감상하라, 이런 뜻이겠지. 어쨌거나 <플래닛 테러>는 <그라인드 하우스> 또는 동시상영관의 전통에 따라 적나라한 가짜 예고편 <마셰티>로부터 시작한다. 액션! 서스펜스! .. ㅋㅋㅋ.. <마셰티>는 소위 B급 장르의 무비들이 내세우던 특징들을 짧은 시간 안에 왕창 몰아서 보여준다. 예고편만 봐도 이후 펼쳐질 영화가 대충 어떤 영화인지는 감이 잡힌다. 그러고는 곧장 지직대는 잡음 소리와 비 내리는 화면 가득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이 봉을 잡고 끈적끈적하며 뇌쇄적 자태로 춤을 춘다. <플래닛 테러>의 주연을 맡은 로즈 맥고완은 영화의 주요 출연진 중 <데쓰 프루프>에도 동시 출연한 유일한 배우다. (<데쓰 프루프>에서의 로즈 맥고완은 집에 가기 위해 스턴트맨의 차를 얻어 탔다가 처참하게 죽는다)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바이러스 DC-2가 퍼지며 텍사스의 어느 작은 마을이 좀비들의 천국으로 변한다. 미국 정부의 배신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멀둔 중위(브루스 윌리스) 등 군인들이 바이러스 항체 소유자를 찾기 위해 바이러스를 대량 살포한 것이다. 마을 의사를 꿈꾸다 고고 댄서가 되었고, 이제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체리 달링과 그녀를 사랑하는 엘 레이(프레디 로드리게즈) 등 생존자들은 살기 위해 좀비들과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벌인다.
영화는 정말이지 ‘유치찬란저질잔혹 무비’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정도로 B급 감성의 극단을 내달린다. 스토리만이 아니라 음악도 엉뚱한 부분에서 비약과 과장을 일삼으며, 카메라는 마치 해부학 교과서를 보듯이 사람들의 신체가 절단되고 뜯겨져 나가는 과정을 세세히 살핀다. <시체들의 새벽>이 연상되는 트럭으로 좀비들을 박살내는 살육의 현장을 제공하기도 하고, <28주후..>가 연상되는 헬리콥터 프로펠러로 좀비들의 신체를 분리해 내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화면은 온통 피로 범벅된다. 특히 마지막 머신 건을 다리에 장착하고 좀비들을 쓸어버리는 체리 달링의 액션 장면은 나중에 그 장면만 따로 떼어내 보면 스트레스가 절로 해소될 명장면이다.
이 영화에 잔인함만 있는 건 아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너무 웃긴다. 잘린 다리에 책상 다리를 붙여 넣어 뒤뚱거리며 걷는 체리 달링의 모습은 그 자체로 몸 개그이며, 특히 엘 레이와 사랑을 나눌 때 높이 들어 올려지는 나무토막이라니.... 이 장면에서 정말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하늘로 날아올라 좀비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체리 달링은 어떻고. 이렇게 보면 의사와 코미디언이 되고픈 체리 달링의 희망은 영화를 통해 구현된 셈이다. 즉, 체리 달링은 세상을 구하는 의사이자, 관객을 웃기는 코미디언이며, 이 과정을 통해 아무리 허접한 재능이라도 쓸 데가 있다는 걸 너무도 확실(!)하게 증명해 보인다.
물론, 이 영화의 최고 매력은 <데쓰 프루프>와 마찬가지로 예전 <그라인드 하우스> 또는 동시상영관에서의 관람 경험을 현대에 되살려 냈다는 것에 있다. 화면에 비가 내리는 것이야 그렇다 치지만 로즈 맥고완의 누드를 감상할 수 있는 에로틱 만점의 장면에서 느닷없이 필름이 손상됐다며 훌쩍 건너뛰는 감독의 장난질이야 말로 화는 나지만, 정말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다. 이 유명한 ‘미싱 릴’ 장면은 애당초 시나리오 부분에서부터 기획되어 만들어진 장면이라고 한다. 에로틱 장면도 그렇지만 엘 레이의 숨겨진 과거가 필름이 끊기고 훌쩍 건너뛴 장면에 숨어 있다. 동시상영관에서 필름이 끊겼다면 미리 본 사람에게 물어보기라도 했다만, 대체 누구에게 물어보라고????
<그라인드 하우스>로 봤을 때, <데쓰 프루프>의 마지막 격렬한 복수도 유쾌하고 신났지만 <플래닛 테러>가 전체적인 짜임새나 영화 제작의 취지로 봤을 때 분명 한수 위다. 길거리나 전철에서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다. 설마하니 하나님이 그렇게 단순하게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눠 천국과 지옥으로 보낼까 싶기도 하고, 그건 전도라기보다는 협박이다. 사랑의 종교라면서 위협하고 겁을 줘서 전도하려 하다니. 아무튼 그 말을 조금 인용하자면 이 영화는 ‘취향에 맞으면 천국이요, 다르면 지옥이다’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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