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버튼의 염세적 슬래셔 오페라. 가위 대신 면도칼이 운다.
파이프오르간이 나지막이 울고 체리빛 촛농 같은 걸쭉한 피가 스크린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가느다란 피의 시내는 고기 가는 기계 틈으로 비어져 나와 지하의 하수로까지, 도중의 모든 것을 어루만지며 스멀스멀 나아간다. 흑백영화로 착각할 만큼 무채색으로 도배된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의 화면에서, 피는 눈을 찌르는 유일한 홍조(紅潮)이기도 하다. 임박한 과다출혈을 예고하듯, 곧이어 등장하는 인물들의 낯빛은 희다 못해 푸르다. 퀭한 눈과 얼굴을 집어삼킨 다크 서클, 악몽으로 버둥대다 방금 일어난 머리매무새. 팀 버튼의 전작 <유령신부>의 인형들이 흑마술을 빌려 시한부 생명을 얻는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하긴 복수를 위해 지옥행을 잠시 보류한 주인공 스위니 토드(조니 뎁)는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나기 전에 이미 ‘살아 있는 시체’가 된 인간이다.
1979년 초연된 스티븐 손드하임의 동명 뮤지컬을 영화화한 <스위니 토드…>는 ‘뮤지컬영화’ 하면 떠오르는 왁자한 낙천주의에 대한 기대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연쇄살인 슬래셔 뮤지컬(!)이다. 이야기는 스위니 토드의 귀향으로 시작된다. 그는 한때 사랑스런 아내와 소박한 행복에 겨웠던 런던의 이발사 벤자민 바커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아내를 탐한 치안판사 터핀(알란 릭맨)은 그에게 누명을 씌운 뒤 신대륙의 유형지에 감금했고 15년 뒤 바커는 탈옥에 성공해 스위니 토드로 변신한다. 돌아온 그를 알아본 옛 집 주인 러빗 부인(헬레나 본햄 카터)은, 바커의 아내가 터핀에게 강간당한 뒤 음독했고 딸 조안나는 판사에게 강제 입양됐다고 전한다. 수치를 모르는 터핀은 장성한 조안나를 아내로 삼으려 한다. 마침내 되찾은 면도칼을 치켜든 조니 뎁의 기괴한 희열에 찬 외침은 관객의 심장에 첫 번째 비수를 꽂는다. “이제야 나의 팔은 다시 완전해졌노라!”
대립하는 두 세계를 상징하는 금발 여인과 검은 머리칼 여인 사이에서 팀 버튼의 남자주인공들이 줄곧 벌여온 방랑은 <스위니 토드…>에서도 계속된다. <슬리피 할로우>의 크리스티나 리치를 빼닮은 금발의 딸 조안나는 친아버지와 제대로 재회하지 못한다. 대신 불행한 남자의 곁을 지키는 여성은 그를 예전부터 짝사랑해온 그늘의 여인 러빗 부인이다. 복수에 눈이 뒤집힌 남자 옆에서 그녀는 가망 없는 구애의 노래를 속삭인다. 조니 뎁과 헬레나 본햄 카터의 가창력은 객석 뒷줄까지 사로잡아야 하는 무대 뮤지컬에서는 미흡할지 모르나, 노래가 무엇보다 연기의 연장인 뮤지컬영화의 장에서는 족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배우의 음색과 표정을 적절히 포착해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영화 기계 장치의 엄호가 있다. 가장 매력적인 레퍼토리는 한 화음 안에서 엇갈리는 열망을 표출하는 동상이몽의 이중창. 스위니 토드와 부르는 <My Friends>, 떠돌이 소년과 부르는 <Not While I’m Around>에서 헬레나 본햄 카터의 파트는 외롭고 불안한 심경을 토로하는 일종의 방백으로서 긴 여음을 남긴다. 조니 뎁의 바삭거리는 음색은, 대사보다는 고조되고 노래보다는 멜로디를 억제하는 서창(敍唱)에서 빛을 발한다.
스위니 토드는 분노의 고열로 분별을 잃고 인간 모두를 복수의 상대로 삼는다. 산업혁명 초기의 폐해로 굶주린 런던에서 그의 이발소와 러빗 부인의 고기파이 가게는 모종의 동업에 의해 호황을 맞는다. 이 밖에도 <스위니 토드…>는 인간을 도구나 재료로 대하는 사회적 행태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형틀’로 변모한 스위니 토드의 이발소 의자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하층민의 법정이자 단두대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가만 놓아두어도 어차피 서로를 죽일 테니, 인간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수혜는 살덩이뿐이라는 스위니 토드의 견해는 염세적 사회관의 끝장인 셈이다. 감독은 면도칼이 목을 가르고 거꾸로 추락한 시신이 머리부터 바닥에 충돌하는 순간을 여러 번 생략 없이 보여준다. 여기에는 팀 버튼의 단골 주인공인 어린이의 영혼을 가진 어른도, 이질적 두 세계를 연결하는 중간적 캐릭터도 없다. 팀 버튼의 세계는 늘 어두웠지만 그 어둠에는 아늑한 귀퉁이가 있었다. <스위니 토드…>의 철저한 염세주의는 그래서 충격이다. 공포와 연민을 직결하고 한길로 치닫는 <스위니 토드…>는 차라리 고대 비극에 가깝다. <빅 피쉬> 이후 <스위니 토드>까지 근래의 팀 버튼은 세월이 가져다준 예술적 호기심과 변화를 솔직히 수용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요령을 골똘히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글 :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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