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불쌍한 다니엘. 다니엘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부친의 장례식 날이다. 조용하고 경건하게 치르려던 장례식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왜? 장례식장이 어떤 공간인가. 죽은 영혼 하나를 두고, 수많은 산 영혼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는 말 없이는 못 배긴다. 모든 상황은 여기서 출발한다. 산 자는 죽은 자 앞에서조차 자기 욕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
부친의 장례식날. 아내는 새 집으로 이사가고 싶어한다. 오늘까지 계약금을 내야 한다며 장례식에서 읽을 송덕문을 고민하고 있는 다니엘을 들들 볶는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장례식비로 써버린 다니엘. 미국에서 유명 작가로 활동 중인 형이 오면 그 비용의 절반의 받아 계약금을 해결할 심산이었지만 이 책임감 강하신 형님은 퍼스트 클래스에 몸을 싣고 오느라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오리발이다. 장의업체에서 모셔온 시신은 생판 모르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고 장례식을 주관할 신부님은 스케줄이 있다며 빨리 식을 진행하자고 성화다. 그리고 심기증환자인 직장동료는 요즘 제 몸이 이상하다며 말 같잖은 소리를 계속 해댄다. 여기에 사촌 누이는 결혼승낙을 받기 위해 남친을 데려오는데 소심한 남친을 진정시키느라 먹인 약이 하필 동생이 몰래 먹으려고 숨겨뒀던 환각제였던 것. 약에 취해 생난리를 치는 남친 달래랴, 하룻밤 불장난 했던 옛 남자 추근대는 걸 받아내랴 이쪽도 정신없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버지의 비밀스런 친구의 등장. 상황은 종잡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엄숙한 장례식장은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어떻게 하면 멋진 장례식 연설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다니엘에게 이 별난 인간들의 난리법석은 그저 깜냥 밖의 일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영화가 있었다. 1996년에 나란히 개봉한 '학생부군신위'와 '축제'가 바로 그것. 두 작품 모두 상가(喪家)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동들을 그린 영화다. 장례식이 '축제'로 비유된 것은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감이 올 것이다. 사돈의 팔촌까지는 아니더라도 때로 손주사위의 직장동료들까지 출현하는 우리네 장례식장은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다. 술과 음식 그리고 놀이(대표적으로 화투)! 곡소리와 영정사진만 쏙 빼면 잔치요 축제인 것이 장례식이다.
그런데 '학생부군신위'의 홍보카피가 의미심장하다. '내가 죽으니 그리 좋나' 당신이 돌아가셨는데 뭐가 그리 좋으며 그걸 어찌 대놓고 표현할까. 천금의 재산을 내려주셨더라도 죽음이란 기쁘지는 않은 법이다. 병수발에 지친 며느리도 시어미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지 않던가. 이걸 인지상정이라고 부르지들 않나. 허나, 요는 당신이 돌아가셔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은 제 갈 길을 가던 삶들이 문득 모여 부딪는 공간이다. 그리고 삶과 욕망들이 파열하는 공간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장례식장은 시끌벅적하다. 마치 축제처럼. 그걸 두고 고인께서는 조금 섭섭해 하실 수도 있겠지만 눈 질끈 감으신 김에 꾹 참아주셔야 할 게다. 게다가 사람들은 죽음 이후를 상상하지 못한다. 차갑게 식은 시신을 보면 그저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죽은 자는 이야기 하지도 못하고 욕망하지도 못한다. 그걸 인정하려면 사람은 웃거나 혹은 울어야 한다. 그저 덤덤하게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영화 '미스터 후아유?'의 장례식장은 신나게 놀아주고, 화끈하게 밤새워주는 우리네 정서와는 맞지 않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자기 삶 안에 갇혀 있는 인간. 그렇게 뭔가를 요구하고 욕구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모습을 슬랩스틱과 영국식 유머로 유쾌하게 보여준다. 결국 중요한 건, 죽기 전까지의 삶이다. 죽음은 결코 위대하다거나 격조있다거나 점잖지 않아서 죽음의 직전과 직후는 누구에게나 힘겹다. 원초적인 감정이 남김없이 분출되기 때문에 때로 추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망자든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예정된 망각의 수순을 거치기 전까지는 죽음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면 매 순간 욕망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걸 이루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영화의 결론, 고인의 삶을 이해하고 인정하자는 결론이 느닷없긴 하지만 수긍이 된다. 그도 결국 욕망하는 한 인간이었을 뿐이니까. 남을 해치거나 악행을 일삼던 사람이 아닌 한 그의 삶이 조금 비루했다고 해서 그 누가 그의 죽음을 욕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결국 그의 뒤를 따를 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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