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예매순위 상위권에 랭크되어
"오, 재밌겠다!", "볼만하겠는데?" 란 생각을 들게끔 만드는 화려한 예고편의 <점퍼>.
나 역시 그런 관객들 중 한 사람이었고, 개봉 전부터 유쾌한 문화생활의 기대를 한층 높여왔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흥미진진한 소재를 어떤 식으로 활용했을까,
영화를 직접 보든, 보지 않든 우리의 관심은
'공감할 수 있는 소재에 대한 상상력을 십분 활용한 내용'에 있을 것이다.
아, 그런데 이거 뭐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뭐야! 그래서 어쨌다고~ 어쩌라는거야!" 볼멘소리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영화를 보며 쉴새없이 화면을 쫓는 화려한 구성과 훌륭한 CG의 영상에
웃기도 하고, '오~' 감탄을 하기도 한다.
<트랜스포머>와 같은 류의 헐리웃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감탄' 말이다.
어디까지나 난 영화를 통해 얻는 감탄은 내면의 울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볼거리와 흥미로운 소재에서 그치는 엉성한 구조의 영화가
한번 씹고 뱉어버리는 껌과 다를게 무엇인가?
(표현이 좀 과했나, 그래, 뭐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바꿔 이해해도 상관없는 뜻의 말이다.)
2007년 초, <데자뷰>란 영화를 볼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데자뷰는 엉성한 내용을 짜맞춰보며 다른 대안을 생각해내는 재미라도 있었지,
(궁금하신 분은 필자의 데자뷰 리뷰를 참고하시길)
올해 초 개봉된 <점퍼>는 버라이어티하고 판타스틱한 세계를 펼쳐놓는 것으로 만족하고 만다.
한번에 힘있는 구성을 욕심내지 않은 감독으로 인해 유감스러울 뿐이다.
시리즈물일 것이란 정보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알았기 때문에, 영화의 결론에도 상당수 실망했다.
궁극적으로 '그냥 한번 (눈을) 즐겁게 하고 땡!'인 영화일줄 알았다면 과연 누가 선택할까,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소잿거리의 화려한 영상과
마치 우리 모두가 점퍼인냥, 혹은 팔라딘인냥 쫓고 쫓기는 추격전에 몰입해 볼 관객들은
나름 만족할 수도 있다. 볼거리만으로도 족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공평하게 '중박'을 주련다.
* 팔라딘 : 점퍼를 뒤쫓아 없애려는 조직의 소속원
주인공 데이빗은 다섯살때 집을 나간 엄마와 술주정뱅이 아빠를 둔 왕따 청소년이다.
매일같이 자신을 하인 부리듯 부리며 폭행을 일삼는 아빠와 단둘이 사는 집도,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여자친구 밀리가 있긴 하지만 모두에게 놀림거리인 학교에서도
데이빗은 외롭고 사는 것이 재미있을리 없는 무료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데이빗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며 밀리에게 유리구슬을 선물하는데
어쩐일인지 밀리는 데이빗의 마음을 고맙게 받아준다.
그런 기쁨도 잠시, 구슬을 빼앗아 놀리며 결국엔 얼음판 구덩이 저 멀리로 던져버린 친구때문에
망가진 이미지와 참을 수 없는 굴욕에 휩싸인다.
데이빗은 손수 자신의 선물을 꺼내려 얼음판에 들어갔다 빠지게 되고,
죽음의 문턱 앞에서 허우적댄다. 그 순간 데이빗의 첫번째 순간이동이 실현되고 만다.
이대로 죽는 줄만 알았던 찰나에 알게 된 진실,
데이빗은 순간이동의 초능력을 지닌 '점퍼'였던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간파한 이후, 독립적인 자유의 특권을 누리게 된 데이빗의 삶은 반전된다.
(집을 나가 전혀 다른 곳곳에서의 삶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 데이빗의 말처럼 집이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랴?)
여기에 이 영화의 첫번째 볼거리가 있다.
세계여행이 꿈이었던 밀리의 영향일까,
매일 수십곳의 장소에 순간이동을 하며 본격적으로 삶을 즐기기 시작한 점퍼.
우리의 일차적인 상상력 쯤 미칠, 이 즐거운 인생을 엿보는 재미에 빠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즐겁고 신나는 점퍼의 인생이 가지는 '책임감'에 대해
우리가 물어야 할 것들을 영화는 친절하게 묻고 결론내린다.
신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했기에 죽어줘야겠다, 는 것.
이런 허무하고 진부하며 무책임한 구성이
점퍼와 대비되는 '팔라딘'이란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으로 포장된다.
겁도 없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살다 인스턴트식 연애질과 작업에 실증을 느낀 데이빗은
8년만에 자신의 첫사랑 상대인 밀리를 찾아간다.
이 일로 인해 팔라딘에 노출된 점퍼가 되고 만다.
(8년동안이나 팔라딘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의 스포일러,
그러나 눈치빠른 사람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힌트, 팔라딘인 롤랜드가 데이빗을 찾아와 묻는 대사.)
그때부터 시작되는 점퍼 데이빗과 팔라딘 롤랜드의 추격전.
잔인한 팔라딘은 포획한 점퍼를 무차별 살상한다. '신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밀리는 결코 범상치않은 미스테리 인물 데이빗과 점점 사랑에 빠져들게 되고
이런 데이빗의 상황을 지켜보던 능숙한 점퍼 '그리핀'은 그에게 얌전하고 조용히 살라며,
그렇지 않으면 네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피를 볼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핀은 점퍼생활을 즐기기보단 자신들을 뒤쫓는 팔라딘 일당을 잡으러 다니는 희안한 점퍼이다.
자신과 똑같이 점퍼였던 부모님이 롤랜드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에 복수를 한다, 는 설정.)
어쨌든 결국 자신이 사라진 뒤로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되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 데이빗은 그리핀에게
본격적인 롤랜드 일당의 소탕작전에 동참시켜 줄 것을 부탁한다.
여기에 이 영화의 두번째 볼거리가 있다.
그리핀은 그동안 팔라딘을 무찌를만한 강력한 무기개발이 힘써왔다.
그리고 데이빗은 팔라딘을 유인할 미끼가 된 점퍼이다.
이 둘이 힘을 합치면 승산의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
그리하여 예기치않게 한 패가 된 그리핀과 데이빗.
쫓고 쫓기는 점퍼들과 팔라딘을 보고 있자면 넋이 나갈만큼의 정신없는 화면이 쉴새없이 등장한다.
겨우 롤랜드 일당을 가두는 것에 성공한 데이빗과 그리핀.
그러나 그곳엔 데이빗의 여자친구 밀리가 잡혀있다.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줄 아냐며 밀리를 잊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그리핀과 달리
팔라딘으로부터 위험한 것 따윈 안중에도 없는 데이빗은 밀리때문에 이성을 잃는다.
(폭파장치를 놓고 벌이는 두 사람의 결투는 어쩐지 안스러울 정도로 지친다.)
결국 두 점퍼의 싸움으로 팔라딘을 이기느냐, 지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 상상력의 끄트머리.
영화는 종국엔 헐리웃 영화의 위대한 법칙, 영웅만들기에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데이빗을 '건물을 이동시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에 성공시킨다.
또한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팔라딘의 눈을 피해 살아올 수 있던 베일이 벗겨지며 결말을 향한다.
(스포일러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 를 드래그 하시길.)
다섯 살 때 사라진 데이빗의 엄마는 점퍼를 뒤쫓아 없애는 팔라딘이었다.
때문에 아들을 보호하고자 점퍼의 흔적을 없애 그동안 데이빗을 보호해왔던 것.
롤랜드 일당의 부서장(?)까지 된 막강한 팔라딘, '메리 라이스' 였으니
그는 끝까지 무사한 점퍼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인간미를 발휘하려 했던것인지,
사랑을 택하고 위대한, 혹은 막강한 점퍼가 된 데이빗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친구 밀리가 "날 놀라게 해봐!", 했더니
함께 손을 잡고 사라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모든 정답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던 주인공이라는 점,
비현실적이고 보는 사람 힘빠지게 하는,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고 미련한 행동을 일삼았던 점.
이 영화의 한계치였다.
게다가 여주인공의 마지막 대사, 날 놀라게 해보라니- 어이가 없다.
덜 유치하고, 덜 로맨틱하며, 덜 인간적이더라도
<점퍼>는 점퍼가 가진 훌륭한 소재를 소재에서 그치지 않고
좀 더 책임감 있고 설득력있는 내용으로 만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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