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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버튼과 조니뎀의 '잔혹한' 이야기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대한 영화 <스위니 토드>가 뮤지컬이 원전이었다는 것, 그 뮤지컬이 실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딴 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꽤 놀라웠다. 일부러 아무 정보없이 관람한 시사회, 스위니 토드의 첫 등장부터 노래로 진행되는데 적잖이 놀라고, 멋진 음악들에 감탄하여 찾아본 정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 '태생'이 영화 후 광고문구의 '복수극'에 갸웃했던 이유란 걸 알아차렸다!
영화헤살있습니다 - 결말까지 있으니 주의하세요.
영화가 끝나고 처음 했던 생각이었다. 이걸 복수극, 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스위니 토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물론 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직 그것에만 사로잡혀 있지만, 극으로써 이 영화를 복수극 - 이라고 할 수 있느냐, 는 의문이 생겼다. 복수 라는 것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목표로 삼아 계획을 짠 후 살인이든 상해든 당한 만큼의 상 응하는 행동을 하는 것인 일반적인데 스위니 토드는 목표만 있지 행동이 없는 것이다. 물론, 광장에 나가 비들에게 미끼를 던지지만, 그것이 좌절된 이후에는 오로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죽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이 터핀 판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PlanB 따위는 세우지도 않고, 터핀 판사의 동태를 살피지도 않고, 무엇보다 딸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려 하지도 않고 말이다. 스위니 토드가 정말 원했던 것이 가족을 찾는 일이었는지, 판사를 죽이는 것이었는지 알 수 없어지는 대목도 이 부분이다. 가게를 위해 고기가 필요했던 러벳 부인과의 노래들은 그저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비겁한 자기최면에 불과하다. 노래로 지목했던 변호사, 군인 같은 이들을 죽여, 상류계급이 하층민을 죽여왔던 역사를 뒤집겠다는 호언장담은 간 곳 없다. 연고가 없는 이들을 무감각하게 죽여나간 스위니토드는 그 때부터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된다. - 부자를 증오한다면서 노인과 여자를 살해한 유영철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약한 자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그의 태도는 15년 전의 터핀과 다를 바 없다 . 자신이 감금됨으로써 '연고가 없어진'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야 마는 필연적인 아이러니를 자초한 것이다. 손끝의 칼날이 방향을 잃는다. 피해와 가해, 분노와 복수가 뒤죽박죽되고 찾고 싶었던 것을 알아보 지조차 못하는 혼돈 속에 구원은 허상이 되고 더욱 깊은 절망은 숨이 끊어져도 핏빛으로 흘러내린다 .
이것은 한 개인의 복수극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작은 인연들을 모두 이으면 결국 자기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하여 타인과 자신의 경계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무서운 진리를 외면하는 것에 대한 경고에 가깝다.
겉과 속이 다르고, 천박하고, 욕심많은 인간에 대해 언제나 냉소적인 시선을 견지하면서도 단 하나 의 순수한 어떤 것(<가위손>의 에드워드나 <빅피쉬>에서 아버지의 허풍, <화성침공>에서의 올드팝 같은)에는 뜨거운 애정을 보여왔던 팀버튼이 그 한줄기 빛마저 거둬들인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그래서 확실히 '잔혹'하다.
이 영화에서 인간이란, 모두 일그러진 가면을 쓰고 웃고 떠들며, 눈 앞에서 벌어지는 타인의 고통이나 불의를 외면하고, 누군가는 살해하고, 누군가는 요리하고, 나머지는 타인의 살점을 뜯어 먹으며 환장하는 ㅡ 모두가 공범인 하찮은 존재이다.
스위니 토드가 노래하는 '크고 시커먼 구멍' 속에서 하수구 냄새보다 더 비릿한 악취를 풍기는 게 인간이라는, 극도의 냉정함이다. 마지막, 꼬마 토비가 스위니의 목을 거침없이 긋는 장면에서도, 그 아이가 순수한 존재이기에 심판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꼬마의 손에까지 피를 묻히는구나,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올 뿐.
청년 안소니가 조안나를 흠모하여 어디서든 "I Feel you"를 노래하는 장면은 솔직히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였는데, 뮤지컬에서의 Love song 가 빠져서이기도 하겠지만, 감독이 일부러 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니 토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싶은 것이 첫째 이유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러벳부인이 말했던 스위니토드의 죄목 '어리석음'이 자꾸 생각났다. 이 영화의 모든 인물이 그러하지만 청년이야말로 오로지 욕망만을 위해 움직이는데 그것이 어찌나 어리석은지 오히려 우스울 지경이라는 것이다. 청년의 순진하고 섣부른 행동으로 스위니의 첫 복수가 좌절되고, 그 이후에 무차별 살인이 시작되었 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순진함과 어리석음. 목표를 위해 주위를 살피지 않는 맹목이 죄의 뿌리라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다양한 감정을 상징할 수 있는 색을 인공적으로 빼고 새벽같이 푸르스름한 색감과 과장된 분장으로 인물들을 마치 시체처럼 표현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러빗부인의 By the Sea 상상 장면에 쓰인 밝고 명랑한 색들도 스위니토드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지 못했다. 코믹한 그 장면은 러빗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그래서 꼬마의 진심에 마음이 흔들 리지만 결국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가두고 마는 슬픔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가장 슬펐던 것은 그 모든 이야기를 스위니가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비밀을 공유한,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인 두 공범자는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 서로의 꿈을 이용하기만 한다. 그것은 가까우면서도 억만광년만큼이나 먼 - 사람사이의 관계 , 인간(人間)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위니토드가 불쌍하지 않았다. 그의 비극이 슬프긴 했지만 동정이 가지 않았다. 동정따윈 필요없는 당연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스위니 토드 -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는
극대화된 분노와 비뚤어진 욕망에 잠식당한 인간에게 경고하는 시퍼런 칼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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