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신체연구자와 목수의 교훈, 그것이 전부이다.
영화가 주는 '혐오', 그것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공식은 간단하다.
인간의 신체는, 다른 구조체와 별 다를 것이 없다.
구조는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구조의 전체가 필요하지는 않다.
신체에는 급소가 있다. 하지만 그 이외는 전부 급소가 아니다. 다만,
이외의 곳을 다치게 되었을 경우, 파열되는 혈관의 단면에서 나오는, '피'.
일정량이상 흘리게 되면, 생명은 더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중요한 기재가, '고통'.
'고통'은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상처가 났을 경우 정말 위험한 건, 고통이 아니라 흘리는 피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이 상처를 어떻게든 하라고 알리는 경보음 같은 것이다.
급소를 다치면 사람은 죽지만,
급소를 다치지 않으면 사람은 죽지는 않지만, 아프다.
쏘우의 모든 테스트는, 그렇게 '죽음'과 '경보'의 사이에 놓여있다.
게임을 이겨내면, '경보의 고통'을 지나지만 살아남을 수 있고,
게임에서 진다면, 더이상 이생의 공기를 마실수 없다.
하지만 게임 자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즉,
쏘우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가 겪었던 신체적 고통(쏘우 1에 나오는 교통사고 + 암)과
정신적 고통(쏘우 4에 나오는 그의 아내의 유산)은,
그를 '선생'이 되게 '만들었다'
그의 삶에 대한 생각,
그가 죽음을 맞이하며 느껴왔던 삶의 가치들.
자신에게는 보이지만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가르침, 그것이 녹아들어 있는 위험한 게임.
어쩌면, 모든 피시험자들에게 필요한 건,
조금의 시간이었을지도.
하지만 쏘우가 말한대로, '시간은 환상'일 뿐이니,
사회와 지구는 전부 개조시킬 수 있어도,
사람은, 자기 자신만은 바꿀수 없다는 건가.
그래서 쏘우의 게임은,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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