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이 극장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과 그 뒤로 독립영화관인 필름포럼에서 장기상영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기담을 본 관람자가 재상영을 바라는 글을 띄우고 서명을 받기도 했다는 기사가 얼핏 떠오른다.
2007년 여름이 가던 시기의 상황들이었을 거다.
난 그 당시 기담을 보지 못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쏟아며나오는 한국공포영화들에 질려있었고,
기담도 그렇고 그런 영화중 하나일거라는 지레짐작에, 기획성공포영화일텐데 독립영화관에서 상영을 하질 안나, 웬 호들갑들이야라고 생각하다 말았다.
그런데 기담에 대한 이야기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 가도록 잊을만하면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리고 한번쯤 보고싶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양이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못보고 지나쳤을거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하이퍼텍나다에서 마지막 극장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강양이 보러가자고 전화를 했고
마지막 극장상영을 하는 기담을 볼 수 있었다.
한여름에 봐야 할 공포영화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12월 말에 보는 것도 나름 나쁘진 않았다.
전무송 아저씨, 오랜만에 화면에서본듯. 조금 늙어보였다. 얼굴에 살 오른 모습. 전무송이라는 배우는 언제나 연극적인 톤을 버리지 못하는 배우로 내게 기억되었었는데 기담에선 처음부터 여유있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만들어낸 연기 같지 않았다. 신기했다.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들리기 시작하는 나레이션이 좋았다.
할머니나 이모가 옛날 들려주던 무서운이야기들은 "옛날옛날에 말이야~"로 시작된다. 그런 느낌이 났다.
공포물에 대한 상당히 토속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두근두근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드는 공포물로서의
재미를 슬슬 몰아오는 느낌.
배우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나레이션이 통속적이고 전형적으로 쓰인 느낌이 아니라
너무 잘 들어맞는, 1940년대로 넘어가기 위해 잘 구성된 고리로 느껴졌다.
낡았다고 생각해서 쓰지 않는, 아니면 그동안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버려진 장치들을 잘 활용하는 것도 재능이다.
영혼결혼식을 눈에 보이는 영상으로 접한것은 이번이 처음인것 같다. 그 상상과 비현실의 순간을 영상적 상상력으로 잘 살려냈다. 시간의 흐름과 흐름의 리듬과, 상징성을 미술, 촬영, 음악과 더불어 잘 살려냈다.
밀폐된 공간으로 귀신에 의해 끌려들어간 남자는 그 뒤 전혀 다른 리듬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이동한다. 섬뜩한 공포의 통로로서의 과정과 그 뒤에 이어진 아름다운 죽음의 세계.
이건, 엄청난 철학과 상상력과, 편집리듬감과, 연출적 재능없이 불가능해보였다.
영혼결혼식의 화려한 컷들이 끝난 후 욕조에 누워있는 여자시체와 바닥에 흥건히 고인 물, 남자가 그린 여자얼굴데생 그림이 물에 떠 움직이고 있고, 남자는 나신으로 몸을 구부린 채 타일바닥을 잡고 있다.
말 되어지기 힘든 순간들과 이미지들이 있다. 이 장면들 모두는 말로 해석해서 결론내리기 상당히 싫은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이미지만으로 롤러코스트를 태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아라는 배우. 확신하건데 이 배우는 현재의 문명사회 이전에 태어났다면 분명 혼과 신을 다루는 사람이 되었을 거다. 자신의 몸을 통해 본능적으로-짐승적으로-연기해내는 모습이 정말 대단했다.
이만한 귀신이 지금껏 한국에 있었을까?
이 배우는 귀신을 연기할 때 정말 귀신 이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소름돋는 공포의 느낌이었던가.
오싹함이 주는 희열이 얼마만인가.
영화를 보며 오싹함을 느끼는 순간 지아라는 배우에게 '고맙다'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당신이 한국 귀신을 다시 살려줬어. 나에게 오싹함을 주는 귀신!!!!!! 고맙다!
귀신의 목소리. 울음소리, 중얼거림은 어때야 할까? 그녀는 정말이지 손톱으로 칠판긁는것엔 비하지도 못할
목소리톤을 발견해냈다. 인간의 목소리로 그런 음이 정녕 가능한가 싶을만큼의 아주 독특한 음계를 토해내며 세상의 모든 서늘한 것들, 서러운 것들, 습한 것들, 창백하고 죽어가는 것들, 이미 죽은 것들의 기운을 온몸에 끌어들여 순간 합일했다.
김기덕의 해안선, 시간, 숨에 모습을 보였던 배우. 앞으로도 배우는 이래야 한다는 믿음을 줄 듯.
김보경의 목소리톤은 언제나 불안하다. 배우로서, 연기자로서 난 그녀의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발성에 있어서 아직은 조금 부족해보인다. 메이킹필름 인터뷰 한것을 보니, 연기할 때 그녀가 내는 목소리와 전혀 다르다.
편안함과 편안하지 않음에 있어서 다르다. 본인이 느끼는 편안함.
언젠가는 꼭 인터뷰할때의 무의식속에 나온 목소리처럼 자신이 느끼기에 가장 편안한 톤을 찾기를....
김보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연기에 있어서는 좋은 장면을 보여줬다.
꼭 필요한 장면이었고, 꼭 필요한 고속촬영이었다.
김보경이 감독과 촬영감독에게 너무나도 감사해할듯한 한 장면.
김보경이 자신의 정체성과 다중인격장애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한 후 상황이다.
화면은 클로즈업으로 김보경의 얼굴을 잡고있고, 김태우의 손이 화면에 들어오며 김보경의 볼을 쓰다듬는다.
남편의 손의 감촉을 얼굴의 모든 신경세포들이 감지하며 떨린다.
슬로우화면으로 보이는 김보경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얼굴을 통해 그녀가 감지하고 느끼고 표현해낸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하나하나 모두 화면위로 각인되었다.
화장기 없이, 투명한 얼굴에 맺힌 슬픔이 아주 매혹적으로 그려져있었다.
옴니버스식으로 세가지의 이야기를 담기에 영화형식이 퍼팩트했다는 느낌은 사실 별로 없다. 그렇지만 삐걱거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 이야기로 옮겨다닐수 있었다. 정남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로 전체가 이어지는 듯 시작했다가 갑자기 교통사고 관련된 소녀이야기가 이어붙은 느낌이 조금 있긴 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기에 킹덤류의 스토리를 생각하기도 했고.
결말을 어떻게 끝낼셈인가 궁금했는데 담백하게 잘 끝난 듯 하다.
괜히 말도 안되는 묵직한 무언가를 남기려 한다거나 주장하려 한다거나 역사적 상황을 끌어온다거나 했으면 무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기담은 공포씨즌인 여름이 가고 겨울까지 숙덕숙덕 말이 오갈 수 있을 만큼 좋은 영화였다.
연출이 정가형제라는데 뭐하던 사람들인지 전혀 모르겠다.
어쨌건, 역시 혼자하는것 보다 쌍으로 뛰는게 좋은듯하다...
형제나 자매가 같이 영화하는 사람들 부럽다. 이젠 뭐든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이 부럽구나...이런.
영화를 본 후 느낀 점들을 통으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은 이렇게 조각조각 생각나는데로 정리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정리가 편하니까. 통으로 해석해내려면
머리 복잡해지고, 시간 많이 들고 부담되고 그래서 미루다보면
안쓰게 되고
그러면 그 영화를 내가 봤던가 하는 망각의 자루속으로 영화가 떨어져버린다.
앞으로 당분간 능력이 될 때까지는 영화에 대한 조각조각의 단편적 느낌만을 정리해 올릴 것이다.
뒤늦게 기어올라오는 분석이 있으면 덧붙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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