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저는 버스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제가 아는... 그리 고 제 능력으로 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버스는 가고 싶은 그 어디로든 멀리 멀리 데려갈 것만 같았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알 던 그 버스는 제가 커 가면서 너무 타기 싫은 콩나물시루 같은 등 교 그리고 출퇴근 버스가 되었습니다. 커가면서 버스라는 존재도 이렇게 달라지더군요. 사랑과 사람의 인연을 버스와 정류장을 중심 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면 바로 이렇겠죠.
여기 한 사람.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땐 그저 조금 별나고 어울리는 걸 안 좋아하는 좀 까다로운 사람 같지만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 혼 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재섭의 얼굴엔 어둠이 깃들어 있습니다. 졸업한지 오래지만 글도 잘 안 써지고 간만에 만난 대학동기들은 와닿지 않는 이야기만 합니다. 주식, 돈, 결혼... 특히나 저렇듯 아 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소름끼치기까지 합니다. 정 말 한때 그녀를 사랑하긴 했었던 걸까? 그는 그녀와 같은 혜경이 란 이름을 지어준 창녀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런 정류장의 그를 바라본 소희는 그런 재섭에게 친한 친구에게서조 차 느낄 수 없었던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흔히 발견할 수 없는 동 질감을 본능적으로 느낀 그들. 32살의 학원 강사와 17살의 여고생.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재섭’이란 캐릭터 상당히 재미있지 않나요? 국어를 가르치면서도 정작 의사소통에는 재능이 없는 그는 대학 동기나 동료 강사들과는 단절되어 있지만 아이들의 시덥지 않은 농담도 받아주고 어설픈 장 난에도 나름대로의 인내심을 발휘합니다. 그가 싫은 건 어른이 아 니라 자신에게 어떤 목적을 심어주지 못한 세상일지도 모르겠습니 다. 다른 사람 따윈 상관없는 게 아니라 사실은 너무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자신과는 전혀 의사소통이 안 되는 주 변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무감각해지는 연습을 해왔던 것이겠죠. 소중한 게 없으면 지켜야 할 게 없고 지켜야할 게 없으 면 그만큼 상처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재섭이 소희를 만나 운전면허를 배우고 올지 안 올지 모를 버스 속 그녀를 기다리고.... 이미 잊은 줄 알았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는 건 그에게는 너 무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은 정말 버스 정류장 같은 영화였습니다. 버스 정류 장에 정확히 내리면 목적지에 갈 수 있지만 잘못 내리면 황당하고 막막한 느낌. 감성코드가 맞는 이에겐 상당히 괜찮은 영화겠지만 느낌이 안 오는 관객에게는 허무개그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전.... 이 영화 꽤 좋았습니다. 물속에 막 들어갈 땐 엄청나게 차갑지만 조금만 지나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 은 이미연 감독이 영화 성격을 너무 냉정한 쪽으로 잡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부분부분 영화를 따뜻하게 만드는 요소가 삽입돼서 그런 느낌을 중화시켜 주기도 했구요. 그런 요소가 캐릭터에도 작용해서 그냥 우울한 캐릭터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더군요. 남녀 주인공 캐 릭터 모두 “왜?”라는 질문이 힘든 감정선 잡기가 어려운 캐릭터였 는데 김태우와 김민정이 서로 보조하면서 잘 잡아주고 있었구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눈에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다는 생각 이 듭니다. 바로 옆에서 손을 잡고 걸어도 무척이나 멀게 느껴질 때가 있고, 바다 건너 저 멀리 있어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 질 때가 있으니까요. 저에게 [버스, 정류장]은 하나의 느낌이었습 니다. 싸하고 허전하고 마음도 아프지만 그래도 그 존재 자체로 마 음의 기댈 곳이 되어 주는 그런 느낌..... 소희와 재섭에게 그게 사랑인지 아니면 공감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이젠 길이 떠나기 위해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 는.... 돌아오기 위한 길이 되리라 믿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