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아아트홀에서 그 영화를 봤을 때 뭐라고 해야하나... 놀랬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흥분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소문으로만 듣던 영화를 마침내 봤다는 만족감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전에도 단편 영화는 나름대로 봤었는데... 한 스토리 라인 안에 들어가지 만 장르도 틀리고 방식도 틀렸던 이 옴니버스 영화는 참 새로운 느 낌이었습니다. 거칠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자 신감이 보이더군요. 그 영화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였구요. ^^;; 이번에 [피도 눈물도 없이]의 류승완 감독 전작이었죠.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수진은 소란스러운 투견장 주변의 사람들을 쭉 훑어봅니다. 초조하게 난간을 톡톡 두들기며 누군가를 기다리 죠. 마침내 집채만한 새까만 가방을 든 경선을 발견한 그녀의 묘 한 표정.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수진과 경선. 그러나 그들은 공동 의 목표를 향해 뛰는 한 팀입니다. 바로 〈돈〉이죠. 한 때 금고털 이로 날렸던 경선은 이제 도박빚만 산더미같이 안기고 도망간 남편 대신에 퇴물 깡패들에게 시달리고 있고, 한 때는 가수라는 꿈이 있 었던 수진은 라운드 걸 시절에 만난 독불에게 인생을 저당잡힌 채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중이었죠. 자신을 괴롭히는 남자 들과 지긋지긋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오로지 크게 한탕해서 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운 계획이 오늘 밤 건수입니다.
전 경선도 경선이지만 수진에게 흥미가 많이 생겼습니다. 초반에 맞을 걸 알면서 일부러 엇나가던 수진은 자신을 패던 독불이 행인 에게 맞자 필사적으로 말립니다. 어쩌면 전체를 통해 수진의 캐릭 터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건 단순히 미운 정이나 맞는데 길들여져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더군요. 바닥에서 어떻게든 기어오르려고 하 지만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쥐는 게 없는 독불이 자신만큼이나 싫고 자신만큼이나 불쌍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제발 날 좀 가만히 나 둬!”라고 하는 그녀의 외침은 독불의 폭력뿐만이 아니라 더 이상 막다른 길로 수진 자신을 몰아넣지 말라는 외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때때로 독불을 바라보던 수진의 슬픈 표정과 작은 한숨에서 느껴졌거든요.
재미있는 게... 캐릭터는 수진에게 끌렸지만 배우로써는 이혜영에 게 더 끌렸다는 점입니다. 수진에 비해 경선의 캐릭터는 평면적인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 캐릭터를 제 눈에 확 들어오도록 만드는 것 은 캐릭터의 와일드함보다 배우에게서 배어나오는 강인함 때문이었 습니다. 과연 이혜영이 아니었다면 경선은 어떤 모습으로 스크린에 나타났을지 상상이 안 가더군요. 정재영도 자신의 자리를 못 찾던 [킬러들의 수다]보다는 영화 속으로 잘 스며들어 자신만의 색깔을 내고 있더군요. 무엇보다 이 영화에선 그동안 우리가 잊고 지냈던 중견배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자칫 캐릭터 남발로 산만해 질 수 있는 영화를 그들이 오밀조밀 든든하게 받쳐 주었기에 훨씬 안정적인 영화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되거든요. 어쩌면 그동안 배 우가 없었던 게 아니라 몰랐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전 매끈하지만 무미건조한 거보다는 거칠지라도 색깔이 있는 영화 가 좋습니다. 어떤 장르든 어떤 이야기든 그런 감독은 보고나서 다 음 영화를 기대하게 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전 류승완 감독이 좋습 니다. 물론, [피도 눈물도 없이]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비해 나은 점도 있고 못한 점도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미지 과잉이 라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이 아직은 덜 다듬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성심성의껏 영화를 계속 찍는다면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장르 영화를 제대로 하는 멋진 감독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설레임. [피도 눈물도 없이]는 저에게 그런 설레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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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e65
멋진 감독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설레임.
2010-08-2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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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 없이(2001, No blood No tears)
제작사 : 좋은영화 / 배급사 : (주)시네마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