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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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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7 오전 11:30: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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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섭이라면 '싫으면 할 수 없고'라고 내뱉듯 말할 지도 모르겠군요. 아마도 소희는 별이 몇개인가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테구요.
이 영화의 힘은 찰진 밥 같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 대사,에 있습니다. 노라 애프런식 로맨틱 코미디처럼 톡톡 튀지도, 그렇다고 노희경의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철학적이지도 않지만, 현실감 있어서 오 히려 멋스러운 대사들.
가령, 재섭과 소희가 대화를 하던 중에 재섭이 '난 솔직한 거라 생각 되는데?' 하자 소희가 '애정이 없는 거겠죠"라고 받아칩니다. 그래요.. 우리는 아니 나는, '솔직함'을 빙자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 가슴에 비수를 꽂았을까요.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같은 말도 빙빙 돌 려 말할 수 있음을 발견한 순간부터 내 솔직함은 애정없음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학원선생님 중 하나가 소희에게 "소희가 국어선생님한테 마음 있나 보네?"라고 하니까 소희는 "마음만 있는 거 아닌데.." 라며 중얼거립 니다. 아마도 소희의 당돌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겠지만, 난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팠는지. 나는 어쩌면 '내가 마음 두고있는 사람 때 문이라면 힘든 것 쯤 감내할 수 있'는 그녀를 질투했는지도 모릅니 다. '마음은 있는데..' 어쩌구 하면서도 뒤따를 수고를 짐스러워하는 이기적인 나는, 말이지요.
이 영화의 또다른 힘은 시네마스코프 사이즈 화면이 제대로 살려내는 도시의 풍경에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 지하철역이라는 너무나 '익 숙한' 공간에서 만나는 너무나 '낯선'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완전 한 他者일 뿐입니다. "넌 별로 반갑지 않은가보다?"하는 물음에 "네? 저도 반가운데요?"라고 답하는 사오정식 대화가 낯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린왕자'의 여우가 말했듯 수백 송이 장미꽃이 있 어도 내게는 나와 '관계를 맺은' 단 하나의 장미꽃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니까.
참, 영화 '오! 수정'을 연상시키는 카메라의 시선도 흥미롭습니다. 처음에는 재섭의 시선에 들어오는 풍경을, 다음에는 소희의 시선에 들 어오는 풍경을 보여줍니다.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어 쩌면 그리도 다른지. 재섭의 시선을 따라갈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원조교제 아저씨가, 소희의 시선을 따라갈 때는 눈에 확 들어옵니다. 두 사람이 같이 타고 가던 전철 안에서 만약 카메라가 방향을 틀어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 을 비췄다면.. 걔중에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테지요. 부부처럼 보이는 남녀라도 알고보면, 화양연화의 차우 와 리춘처럼 위태위태한 연인 사이일 지도 모를 일.
이 영화는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피터팬 신드롬을 자극하기도 합니 다. 난 '성인이 된 여자들이 싫어'라고, 재섭은 말하지요. 하지만 어찌 여자 뿐이겠습니까. 속물이 된 남자들도 싫은 건 마찬가지지요. 젊을 때는 문학과 정의를 논했던 친구가 이제는 온통 주식과 부동산 투기에 만 관심있는 걸 볼 때, 술을 마실 때는 "내가 내일 당장 때려친다!"고 호기를 부리다가도 정작 다음날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직장일을 계속 하는 동료를 볼 때. 그럴 때 상실감을 느끼는 건 비단 나 뿐은 아니겠지요? 정말 하루키의 말대로 상실의 시대, 이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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