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스패로우는 세상의 끝에까지 갔다 오게 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어느 정도 느낀다. 예전에는 없었던 또 다른 자아들과 친구먹지를 않나, 헛것이 너무 자주 보이는 나머지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일행들을 보고서도 헛것이 아니냐며 헛소리를 한다. 이후 위기와 고민의 순간마다 다중이 친구들이 나타나서 수시로 말을 걸며 잭의 머리 속을 때론 더욱 헷갈리게, 때론 명쾌하게 만든다. 더욱 안그래도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에게 실은 심리적으로 꽤 복잡한 면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 오랜 시간 헤어져 있던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서 오랜만에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다시금 정신을 차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끝을 맺는 순간까지도 허허실실거리며 특유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만냅두질 않는 그의 성격상, 이런 나름의 고민은 생각해 보면 그리 심각한 건 아니다.
정작 꽤 생각해 볼 만한 것은 급격히 늘어난 비중과 존재감에 따라 급격한 삶의 전환기를 맞게 되는 윌 터너와 엘리자베스 스완이다. 해적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잭을 구하고 해적의 활동무대를 되찾는 동시에, 엘리자베스의 사랑도 얻어야 되고 동시에 아버지도 구해야 하는 그지만, 사람 가지고 놀기를 곧잘 하는 운명은 막무가내로 달려가던 윌 터너 앞에 예상치 못한 선택의 기로를 갖다놓는다. 결말부에서 보이즌 기약없는 미래를 담보로 한 윌의 선택은 그동안 가뿐한 활극처럼만 느껴졌던 영화의 분위기에 생각지 못했던 무게감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엘리자베스 또한 윌을 따라 해적들의 여정에 합류했지만, 그래도 드레스는 어느 정도 챙겨 입었던 2편까지와는 달리 3편에 들어서는 적극적으로 선원들을 이끌며 나서야 할 상황에 놓인다. 해적들과의 삶 속에서 하나 둘 씩 포기해야 할 것도 생기면서, 그녀는 이전의 그저 당돌한 젊은 여인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과 나아가 선원들 전체의 앞길을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이끄는 리더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여자로서 견디기 쉽지 않았을 시련을 거치면서, 결국은 남자들과 함께 해도 전혀 뒤처질 것이 없는 강인한 면모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3편에 이르러 한없이 자유로운 듯 했던 이들의 여정에 제동을 거는 운명에 맞서게 되면서, 이들의 마음은 이 항해를 그저 망망대해를 향한 설익은 치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한계에 맞서기 위한 성숙한 여정으로 발전하게 했다. 한없는 자유를 꿈꾸게 하는 바다에서의 여정 속에서 급기야 자신들의 운명과도 만나 대결을 벌인 이들과 함께, 아기자기한 재미가 살아 있던 어드벤처는 어느덧 특유의 유머는 유지한 채 웅장한 스케일과 꽤 듬직한 여운을 이끌어내는 대작의 모습으로 거듭났다. <스파이더맨>처럼 만화 원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반지의 제왕>처럼 완벽한 소설 원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디즈니랜드의 놀이기구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영화치고 이만큼 완결성이 어느 정도 안정된 3부작이 탄생했다는 건 칭찬할 만한 일임이 분명하다.(물론 4편 제작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지만, 결말을 봤을 때 4편이 만약 나온다면 꽤나 억지스러울 것 같다) 생각없이 막 노는 듯하면서도 어느덧 성장해 꽤 멋있는 모습으로 대미를 장식한 잭 스패로우와 그 일행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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