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예매했다고 하자 대번에 아내가 묻는다. “엥? 그걸 누가 보겠어?” “글쎄... 영화를 백편이나 찍은 사람의 백번째 영화라는데 봐도 괜찮지 않겠어?” “난 안 땡기는데...” “코엑스 영화관 16개 중에서 16관, 그것도 하루에 딱 세 번만 하더라, 우리라도 봐야되지 않겠냐?”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안 볼 것 같은데.” “왜 안봐? 게다가 우리도 젊은 사람들이잖아...” “젊기는 개뿔...”
그렇게 좁은 영화관에 들어갔는데 앗 이럴수가... 정말 아내의 말마따나 관객 평균연령 사십을 훌쩍 상회하는 이 어정쩡한 분위기라니, 마치 서편제 이후 두 번째로 영화를 보시는 분들이 아닐까 싶게 엄숙한 표정의 아줌마 아저씨들로 영화관이 가득하다.
사실 백 편의 영화를 찍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양보다는 질, 이라고들 말하지만 양을 채우지 않고도 질이 말끔한 작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러니 영화 백 편을, 그것도 꽤 괜찮은 작품들을 간간히 섞어 가며 찍어낸 사람에게 나름 존경의 염을 품는 것은 매우 마땅하지 않은가.
영화는 십오년전에 본 서편제에 대한 복습과 약간의 변주, 그리고 후일담으로 이루어져있다. 양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송화는 소리를 배우고 동호는 북을 배우며 피로 맺어지지 않은 남매 사이에 피어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전작의 복습이라면, 여배우 단심의 등장이나 고향인 제주에서의 송화의 생활 등은 약간의 변주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기에 송화에게 마음을 품고 있던 용택을 통해 전해 듣는 송화의 이야기와 용택에게 전하는 동호의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묻어나 있다.
근대화의 시기와 맞물려 쇠퇴해가는 우리 소리의 맥을 따라가는 영화는 그러나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칙칙하기 그지없는 화면은 그게 부러 그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우리의 소리를 보여주기에 조재현의 북장단은 어슬프고, 오정해의 연기는 긴 공백탓인지 어정쩡할 따름이다. 노련한 감독의 손으로 이렇게 저렇게 (그럭저럭 읽히는 소설처럼) 만들어진 탓에 지루하지 않게 볼 수는 있었지만 그걸로 그만이다.
그나마 영화를 본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동호가 일하는 극단의 조명창으로 나오는 (무형문화재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인 송순섭)의 소리... 박력이 넘치면서도 쏜살같고,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의 소리를 듣자니 몸에서 전율이 인다. 그가 부르는 적벽가를 실제로 듣는다면 정말 (영화 속 소리를 듣기 위해 모인 마을 사람들처럼) 이야기 속에서 허우적 대고 말 것 같다.
그렇게 돌고 돌고 또 돌던 이 오누이의 이야기는 또다시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 송화를 위해 집을 지었던 동호는 결국 옛아내 때문에 모든 것을 날리고, 섬에까지 들어갔던 송화는 허물을 벗듯 몸만 빠져나간 채 행적이 묘연하다. (설마 서편제 3편을 만드실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어린 시절 송화를 훔쳐보던 용택은 이제 북을 잡고 있는 동호를 훔쳐보고, 동호는 존재하지 않는 송화의 소리에 북장단을 맞춘다.
영화를 보고 이렇게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구나 싶은 감회마저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그 뒷맛이 좋지 않다. 거장의 마지막 박력이 보이는 것도 아니오, 온 몸에서 힘을 빼고도휘엉청 여백으로 모든 것을 품는 초연함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어딘가에 묻어 있을 노작가의 열정을 뽑아 내는 것도 여의치 않고, 기가 막히다는 말 절로 나오는 한국적 풍광을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히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은 탓인지 아내는 나름 재미있었다는 반응이지만 내 입안에 가득 고이는 이 씁쓸함이라니...
ps. 게다가 불완전한... 그러니까 예를 들어 동호는 죽은 아버지의 묘를 찾았다가 결국 그 묘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면서, 누이인 송화에게 왜 자신이 아버지에게 아버지를 향한 예를 보이지 못하는지를 언젠가는 누이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이유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툭툭 끊어먹고 가버리는 것이 임권택의 어떤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난 사실 이런 식의 미진함을 동양적 미학운운하며 애써 아우르는 평론가들의 글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고는 했다. 왜 우리는 존경하면서도 비판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해서... (라고 글을 쓰는 중에 씨네 21을 보았는데 잡지의 말미 독자 게시판 류의 곳에서 두 개의 글을 발견했다. 하나는 천년학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 절묘하게 나와 같은 생각 - 존경과 비판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 영화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한 독자의 비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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