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말소되지 않는 폭력의 낙인.....
처음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을 보고는 대단히 현학적이거나 관념적, 또는 거대한 담론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 영화가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매우 기괴하고 섬뜩한 느낌의 영화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실제 영화는 평이할 정도의 스토리라인에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 영화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표현 수위도 정상적이다. 거기에 진행도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반지의 제왕>의 비고 모텐슨, <코요테 어글리>의 마리아 벨로 등 주·조연들의 연기도 아주 좋은 편이다.
우선 이야기는 무척 단순하다. 한 평온한 마을에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행복한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는 톰 스톨은 어느 날 강도를 무찌른 후 매스컴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톰 스톨이 많은 언론의 각광을 받은 후 필라델피아 거대 폭력조직의 보스인 포가티가 찾아와 톰을 전설적 킬러인 '조이 쿠잭'이라고 부르며 접근한다. 톰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만 차츰 자신이 잊고 지냈던 또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조이가 되살아남을 느낀다. 이제 그는 폭력으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결론적으로 보면 <폭력의 역사>에서는 개인사에 등재된 폭력의 증거는 결코 말소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를 미국이 내세우는 신화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자 전 인류로 확대되어 가는 폭력적 행동에 대한 해부라고 스스로 정의내리고 있다. 영화를 보면 톰이 폭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폭력적인 강도(외부인)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외적인 변화는 내부의 모순에 근거해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면 톰 내부의 폭력성 또는 그의 과거에 기재된 폭력의 경험이 순간적이고 폭발적인 발화의 근본 원인이 된다. 마을 주민의 입장에서도 정작 폭력의 핵심은 내부에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외부인의 위협에만 불안해 한다.
그런 점에서 톰의 아들 잭이 급우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톰이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잭은 자신을 괴롭히는 급우들을 매우 위트있고 재치있는 방법으로 제지해 왔으며, 그럼으로써 싸움을 피해왔다. 그랬던 잭은 아버지의 폭력 행사 이후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아버지처럼 순간적이고 폭발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이는 또 다른 논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 폭력은 유전되는가? 또는 환경적 영향인가? 또는 그저 선택인가?
이 영화가 대단한 건 다양한 측면에서 폭력의 원인, 양상을 살펴보고 있다는 것인데, 눈길을 끄는 장면으로는 톰과 아내 에디의 섹스 장면이다. 영화는 통틀어 두 번의 섹스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번은 에디가 둘이서는 10대의 데이트 경험이 없다며 고등학생 응원단 복장으로 남편을 유혹해서 섹스를 하고, 다른 한 번은 남편의 폭력의 역사를 알게된 후 톰의 폭력적 접근을 거부하다가 계단에서 섹스하는 장면이다. 핵심은 두 번의 섹스가 어린 여학생과 강간에 대한 성적 환상이라고 하는 남성들의 로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인데, 당연하게도 이런 로망을 실제 실천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동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자, 이제 톰에게는 점점 조이의 모습이 겹쳐져 간다. 형을 찾아간 톰은 이제 더 이상 톰도 아니고 조이도 아닌 존재다.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믿어 왔던 조이는 외부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더니 점점 선량한 톰과 동격의 지위까지 올라선 것이다. 영화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급작스럽긴 하지만 더욱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폭력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돌아온 가장을 맞이하는 가족들은 환영도 거부도 못한 채 앉아 있다. 그저 저녁 식탁의 한 자리를 비워뒀을 뿐이다. 가족은 톰 또는 조이의 폭력적 역사와 진실을 알게 됐으며, 지금의 귀환의 의미도 알고 있다. 가족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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