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생각지 못한 발상으로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 신선함으로 대중에게 즐거운 충격을 줘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예술가인 것이다. 남들이 아직 보지 못한 길에 먼저 나아가서 대중을 그 길로 이끄는 선구자 역할을 한다고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남들이 하지 못한 생각을 표출해야 하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사고방식도, 나아가 삶도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하다.
새로운 생각의 창출을 위해 홀로 고민하는 예술가들이 생각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어두운 길로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로 나타나는 부분일 것이다. 사고방식이든 트렌드든간에 남들보다 앞서간다는 것은 그만큼 더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팩토리 걸>의 에디 세즈윅이 그런 경우였다. 대중을 선도하는 동시대의 강렬한 아이콘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남들보다 앞서가는 만큼 그녀의 옆에는 함께 가는 사람이 없었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었다.
유복한 집안의 상속녀로서 캠브리지 미대를 나와 화가가 되기를 꿈꾸던 여인 에디 세즈윅(시에나 밀러)는 보다 넓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에디는 독창적인 표현 방식으로 존경해 마지않던 아티스트 앤디 워홀(가이 피어스)을 만나게 된다. 워홀은 에디의 매력에 순식간에 매료되고, 그림과 영화를 비롯한 자신의 모든 예술 작업이 이루어지는 이른바 "팩토리"에 에디를 초대한다. 이후 에디는 워홀의 독창적 스타일이 부각된 여러 영화에 출연하면서 주목받게 되고, 곧 미국 젊은이들의 패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아이콘으로 급부상한다. 그렇게 화려한 나날을 이어가던 중 에디는 대학 친구의 소개로 인기 절정의 록스타 빌리 퀸(헤이든 크리스텐슨)을 만난다. 팩토리에서 중심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디까지나 워홀의 예술을 표현하기 위한 피사체로서의 취급을 받는 듯했던 데에 반해, 빌리는 에디에게 허황된 예술 속에 머물지 말고 현실에 뛰어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에디에게는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는 지금의 모습도 놓칠 수 없는데, 비극적 현실과 꿈같은 예술을 오가던 에디는 점점 추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독특한 예술 세계로 오랜 세월동안 주목받아 온 예술가의 이야기를 그린 만큼 영화 역시 기존에 봐 오던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틀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오래된 필름을 트는 듯 지직거리는 흑백 화면과 일부러 그렇게 손을 본 듯한 다소 거친 질감의 컬러 화면, 환각과 현실을 넘나드는 듯 희미한 톤의 색감 등 현재 헐리웃 영화의 깔끔한 질감에서 일부러 벗어나 의도적으로 60년대 당시에 가까워지려 노력한 듯한 덜 다듬어진 비주얼은 한편으론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도 줘 영화에 더욱 쉽게 몰입하게 한다. 또한 이러한 다양한 형식의 비주얼적 표현은 영화 속에서 주된 소재가 되는 앤디 워홀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당시 미국을 주름잡던 트렌드를 더 잘 나타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배우들의 메이크업이나 패션 또한 모델로 삼은 실존인물들과 최대한 유사하게 표현함으로써 당시의 강렬하면서도 복고적인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이렇게 영화가 주류 헐리웃 영화에서 좀 벗어나 있는 듯한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출연하는 배우들은 독립영화계에서만 활동하는 배우들이 아니라 영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상당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젊은 배우들이라 눈길을 끌었다. 에디 세즈윅은 시에나 밀러는 아직까지 배우로서의 면모보다는 주드 로 등 미남 스타들과의 스캔들과 헐리웃 패션의 선두주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편인데, 하지만 이런 외적 유명세에 비해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그렇게 소모적이지 않다. 이번 <팩토리 걸>에서의 에디 세즈윅도 그녀의 외적 유명세에 비해 상당히 복합적이고 무거운 성격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에디 세즈윅 역시 당시의 유행을 선도했다는 점에서 시에나 밀러의 실제 모습과 꽤나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선한 듯하면서도 강렬한 눈빛과 과감한 노출, 그리고 순진한 듯 당당한 말투는 에디 세즈윅의 독특한 캐릭터를 꽤 잘 소화해낸 듯한 인상을 주었다.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딧에 등장한 에디 세즈윅의 실제 모습은 시에나 밀러가 참 좋은 캐스팅이었다는 것을 더욱 뚜렷이 상기시켜주었다.
밥 딜런을 모델로 했다는 록스타 빌리 퀸 역의 헤이든 크리스텐슨 역시 <스타워즈 에피소드> 시리즈에서의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이 밥 딜런의 어눌하고 허스키한 말투와 게슴츠레한 눈빛을 최대한 가깝게 표현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패션 아이콘으로, 또는 스케일 큰 대중영화의 캐릭터로 더 뚜렷이 인식되어 온 젊은 배우들이 이러한 비주류 영화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앤디 워홀 역의 가이 피어스가 보여준 연기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앤디 워홀이라는 사람의 캐릭터를 직접 접해본 적은 없지만, 이전까지의 남성적인 모습을 모두 벗어버리고 창백한 얼굴빛에 냉정한 듯하면서도 나약한 예술가의 면모를 그대로 심어놓은 가이 피어스의 연기를 보면서, 워홀의 캐릭터가 얼마나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었을지 상상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세 주연 배우들이 각자 보여준 연기는 (물론 실존 인물이라는 뚜렷한 모델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주류 헐리웃 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로 거듭나기에 충분했다.
우리에게는 앤디 워홀이라는 이름이 더욱 익숙하게 들리겠지만, 팩토리 "걸"을 내세운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의 중심은 앤디 워홀의 이른바 "뮤즈"였던 에디 세즈윅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캠브리지 미대에서 화가로서의 순수한 꿈을 안고 뉴욕으로 온 에디가 워홀을 만나고 유명세를 누리다 점차 몰락해가는 과정이 자극적인 비주얼 속에서도 담담하게 그려진다. 야심차게 뉴욕에 입성하면서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던 그녀이지만 사실 그녀에게는 많은 족쇄가 따라다녔다. 자기는 바람 피는 걸 즐기면서 지극히 보수적인 사고관을 띠고 있는 "퍼지"라고도 불리는 에디의 아버지의 억압 아래 순탄치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때문에 에디는 이제 청춘의 피크인 20대에 접어들며 자유를 가장 많이 갈망하게 된다.
그런 에디에게 있어서 앤디 워홀이 초대한 "팩토리"라는 공간은 그녀가 이전까지 현실에서 접했던 공간들과는 차원이 다른 듯한,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공간이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쓰고 싶은 책을 쓰고, 찍고 싶은 영화를 찍는 그곳은 단순히 한 예술가의 작업 공간을 넘어, 그를 비롯해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 모여 당대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시각을 형성해 가는 독자적인 공간이었다. 제대로 된 자유를 한번도 만끽한 적이 없었던 에디에게 이러한 팩토리의 모습은 당연히 매혹적으로 다가왔을테고, 이제 막 이렇게 생소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몽환적인 요정과도 같은 모습을 한 에디의 모습에 워홀 또한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 사귀는 것도 아닌" 둘의 만남이 시작됐고, 순수와 도발이 묘하게 어우러진 둘의 호흡은 당대 미국의 새로운 예술 트렌드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접하며 점차 삶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에디의 모습은 엄했던 당시 미국의 현실과 겹치면서 충돌을 일으킨다. 월남전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던 시기에 그와는 거리가 멀었던 워홀의 예술 노선은 현실을 외면한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에디 역시 자신이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워홀에게 존중받는다기 보다는, 워홀의 예술 세계를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피사체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빌리 퀸을 만나게 되면서다. 예술적 완성도 못지 않게 현실 참여적 태도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빌리 퀸은 에디에게 워홀이 추구하는 예술성이 후에 얼마나 허황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헛된 예술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지 말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라고 격려한다. 자신의 존재를 보다 뚜렷이 새기기 위해 자유를 선택했지만 어느 순간 에디 세즈윅이라는 독자적 인격체라기보다는 앤디 워홀의 뮤즈처럼 대접받았던 에디는 빌리의 그러한 충고를 받아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워홀로부터 얻었던 정서적 해방감과 유명세 또한 결코 포기하기 쉽지만은 않다.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이상의 자유로움과 반대로 그녀를 구속하려 드는 현실의 충돌은 생기발랄했던 그녀를 점점 지치게 한다.
앤디 워홀이 주인공급으로 출연한다고 해서 이 영화가 앤디 워홀의 예술 세계가 어떤 의미를 지녔으며, 얼마나 독창적이었는가를 새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대신 영화는 앤디 워홀의 옆에 있었던 에디 세즈윅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그녀가 주변에 폭풍처럼 들이닥쳤던 예술적 해방감에 얼마나 쉽게 휩싸이고 얼마나 순식간에 무너져 갔는지를 화려하지만 진득하게 풀어나간다. 그녀의 일생 전체를 지배했던 구속에서 벗어나 맛보게 된 상상도 못했던 수준의 자유. 남들이 못했던 것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자유를 만끽하며 에디는 트렌드의 선두주자로 올라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콘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그렇게 그녀를 홀로 정상에 자리에 세워놓았던 예술적 자유는 동시에 그녀를 지독히도 외롭게, 나약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보수적이고 폭압적인 에디의 아버지는 에디가 함께 한 워홀을 비롯한 예술가 집단을 익숙치 않은 표현 방식에다 동성애자까지 있다는 이유로 쓰레기 취급하고, 에디의 독립적인 가치를 이해해주려는 듯한 빌리는 에디가 몸담고 있는 예술 세계의 허황됨을 꼬집는다. 뿐만 아니라 에디가 힘을 쏟는 워홀의 팩토리에서 에디는 인간적으로 소통하는 연결된 존재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아름다운 피사체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에디가 없다면 그저 에디를 닮은 다른 누군가로 교체하면 될 뿐이라는 식의 사고방식과 함께.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감 앞에서 주변 사람들의 가치관의 차이로, 점점 흔들리는 정체성으로 인해 에디의 정서는 위태로워지고, 마약은 그녀에게 더욱 끈끈한 친구가 되어간다. 결국 그 어느 곳에도 온전히 기댈 곳이 없었던 에디는 마약이라는 극단적 처방에 의존하며 스스로 무너져 갔던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마냥 때깔 좋아 보이는 화려한 예술과 최신 트렌드의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독자적인 유명세를 쌓았던 이 여인이 실은 이 위태로운 해방감 속에서 얼마나 불안하고 공허한 삶을 살았는지를 가만히 따라간다. 독창적 자유를 향해 뛰쳐나왔다가 더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어중간한 위치에 놓인 채 몰락의 길을 택해야만 했던 그녀의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그녀가 너무 순수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억압에 지친 그녀는 결혼과 이혼을 밥먹듯이 하다 죽는 것을 꿈꿀 만큼 너무나 커다란 자유를 원했고, 너무나 순수하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길 원했기에, 그런 순수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것에 아낌없이 제 몸을 던졌다. 결국 곳곳에서 불어닥치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의 폭풍 속에서 그녀는 점점 힘을 잃어갔고, 더구나 누구 하나 그녀를 힘있게 잡아줄 수 있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에디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었던 듯하다고 고백하는 워홀 또한 실은 그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그건 빌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상처투성이로 버려진 건 에디 혼자였던 것이다.
그녀의 자유를 향한, 정체성을 향한 순수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곳은 진정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처음 워홀이 에디를 만나 영화를 찍으면서 어떤 역할이냐고 하니까 "그냥 당신 자신"이라고 했듯이, 에디 세즈윅이라는 여인은 그 어떤 단어로도 대신 설명할 수 없는, 그저 "에디 세즈윅"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였을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런 그녀의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순수한 가치를 섣불리 재단하려는 세상의 시선에 그녀는 너무 일찍 희생당했는지도 모르겠다. <팩토리 걸>은 이처럼 찬란하게 빛났던 60년대 미국 현대 예술 속에서, 그저 "뮤즈"니 "아이콘"이니 하는 대명사로 불렸지만 실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순수한 가치를 지녔던 한 여인의 비극적 삶을 투영한 영화다. 죽음 뒤엔 바로 잊혀질 것처럼 사라졌지만 실은 결코 그렇게 가볍지 않았던 그녀. 차가운 자막 한 줄로 처리된 그녀 생의 마지막부터 실제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인터뷰로 장식된 엔딩 크레딧에 이르기까지, <팩토리 걸>은 에디 세즈윅에 대한 총천연색 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