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어법 vs 역설법
영화 초반, 결코 아름답지 않은 광경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을 때 마치 합창단의 세컨 테너의 독주처럼 흐르는 주인공의 의미있는 대사.
"참...아름답다~ 아름다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표현방법인 반어법으로 시작되는 느와르풍(noir,black)의 합창곡은 검은색 건반으로 반올림된 상태로 후반부까지 팽팽하게 진행되며 관객들을 흡입한다.
작곡,지휘자(각본,감독)을 맡은 한재림의 감각적인 초기설정의 다소 모험적인 시도는 송강호라고 하는 물이 오를대로 오른 solist의 탁월한 연기와, 결코 조연이라고 할 수 없는 동료 배우들의 눈부신 솔리스트와의 호흡에 힘입어 때론 폴카풍의 흥겨운 듀엣으로, 때론 긴박감 넘치는 관현악으로 변주되면서 반올림된 상태의 긴장감을 잔잔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유지하며 반복 진행된다.
반올림의 긴장감에서 오는 피로함과, 영화의 후반부의 안일한 스토리 전개로 인한 산만함은 천재라고 불리는 칸노 요코의 탁월한 청량감있는 음악으로 인해 영화는 안정성을 획득한다.
한 고비가 넘어가고 드디어 펼쳐지는 엔딩부분에서 감독은 이미 머릿속에 수없이 시뮬레이션했음이 엿보이는 회심의 피날레를 선보인다.
브라운관(가상현실의 상징)에서 펼쳐지는 행복한 주인공의 가족들과, 불어터진 라면(현실의 상징)을 차마 삼키지 못하고 흐느끼는 가장의 모습을 클로즈업 시키면서 도대체 누구를 위한 가족이며, 누구를 위한 희생이며, 누구를 위한 행복인지를 강하게 반문하는 역설적인 문제제기를 던지며 영화의 마무리를 '우아하게' 갈음한다.
결코 우아하거나 세련되지 않은 초반 장면의 반어법적인 튜닝에 적응하며 끝까지 달려온 관객들은 군더더기 없이 강한 반향을 일으키려는 영화의 우아한 결말을 맞이하며...당황하게 된다. 연주가 끝났는대도 박수를 쳐야할 지 말아야 할 지 주변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코드진행은 반올림에서 차분하게 마이너 원음으로 바뀌어 있었고, 마지막 역설적인 엔딩이 주는 메세지가 분명 무엇인가 얘기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걸 음미할 겨를도 없이 영화관의 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분주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일까?
2. 우아한 세계 vs 철도원(포포야)
수년 전, 철도원이라고 하는 일본 영화를 보고 며칠동안을 펑펑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굳이 일본영화인건 어쩌면 이번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칸노 요코의 영향인지 모르겠다.)
두 영화가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분명 가족을 향한 뜨거운 '父情'이다. 영화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군중들의 보편타당한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문화적 수단이라고 한다면, 두 영화는 분명 그 영화가 개봉될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2007년 한국의 아버지와 1999년 일본의 아버지라는 존재가 처해있는 시대적 상황이 다르다면, 영화의 표현 방식은 분명 다르게 전개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감독과 작가는 자신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시대적 메세지를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영화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할 지를 고민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임에 분명할 것이다.
한국의 작가와 감독은 조폭이라고 하는 소재와 일상생활이라고 하는 배경을 선택하였고, 일본의 작가와 감독은 철도원이라고 하는 소재와 외딴 간이역의 장소를 선택하였다.
한국에서의 사건들은 특수한 신분(조폭)의 사람도 실은 매우매우 우리와 다를 것 없음을 강조하였고, 일본에서의 사건들은 죽은 딸이 살아온 것 아니냐는 매우매우 비현실적인 몽환적인 설정을 선택하였다.
소재와 배경, 사건이 사뭇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사실 너무나 보편타당한 정서,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식과 가족을 사랑한다,이다.
철도원이라고 하는 영화가 끝나고 필자가 며칠동안 펑펑 울었던 것은, 일본의 눈덮힌 산간마을에 가면 영화속의 주인공같은 누군가의 아버지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사실감과, 바로 그러한 사실감에 입각한 동화(同化)된 감정 안에서, 바로 나의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들이 비현실적이었어도 영화가 끝난 뒤 북받쳐 오르는 느꺼운 감정은 분명 내 안에서의 현실이었고 그 현실속에서 나는 분명히 외부현실에서 존재하고 있는 아버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아한 세계라는 영화가 끝나고 필자가 오히려 당황했던 이유는, 옆집 아저씨같은 조폭이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수 있겠지만 왠지 그동안 수많은 영화속에서 보여진 다양한 캐릭터의 조폭버전 중 가장 새롭고 신선한 설정이었다고 하는 사실감의 결여와, 바로 그렇게 불안하게 몰입된 감정의 동화 끝에서 결국 떠오른 인물이 현실의 내 아버지라기 보다는 영화 속에서 열연한 아버지역의 송강호라는 배우라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3. 표현 vs 사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의 새로운 시도와 그러한 감독의 의도대로 열연한 배우들이 고맙다. 그들은 아마도 사실적인 묘사에서 오는 자연스러움을 소화하느라 정말 진땀을 흘렸음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1999년 일본사회에서는 어쩌면 아버지라는 대상이 뉘엿뉘엿 해가 지는 석양에서 차분히 인생을 정리하며 오랜 친구와 추억을 회상하며 어린아이처럼 유치해지기도 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아버지를 '발견'한 일본의 감독과 제작진과 배우들은 그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07년 한국사회는 어쩌면 오후 4시30분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에 우리들의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보평타당한 시선으로 그들을 '발견'하는 일이 어쩌면 너무나 가혹한 과제를 감독과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요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엄마들은 아마도 아이들의 학원 보낼 준비에 정신없음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과 대비하면 더욱 그렇다)
사실에 기초한 창의적인 표현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동감을 얻어야 하는 영화제작진들이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현실세계에서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면, 그들은 어쩌면 유령같은 허상을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이라고 믿게해야 하는 벅찬 임무를 부여받은 것임에 틀림없다.
실재하고 있으나, 존재감을 상실한 아버지라는 존재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밝혀야 하는 현실이 어쩌면 감독이 마지막 브라운관과 라면의 대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세지였는 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은 우아하게 이 영화를 찍지 않았을 것이다. 조폭보다도 더욱 처절하게 이 작품에 매달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은 영화를 너무 우아하게 찍으려고 했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아하지 못한 투자자들의 입김에 맞서 그들은 조폭보다 더욱 처절하게 사투를 벌였는 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모로, 이 땅의 아버지들은 조폭보다 더욱 처절한 것 같다. 존재감을 상실한 이 땅의 아버지들이 우아하게 현실로 복귀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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