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주인공이 조폭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몇가지 영화의 스토리나 장르가 있을 것이다.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조폭간의 음모와 사투를 다룬 느와르 액션 이라든지 어설프고 멍청한 조폭 주인공이 벌이는 에피소드를 다룬 코미디 영화들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조폭이 등장한다고 하면 처음부터 진부함이 밀려올 때가 있곤 한다. 그래서일까 영화 [우아한 세계] 역시 개인적으로는 큰 기대감이나 호기심이 있었던 영화가 아니다. 물론 송강호라는 배우 이름 하나에만 몇 퍼센트의 기대와 궁금증을 품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생활느와르”라는 독특한 장르를 표방한 것 역시 조금은 호기심을 끄는 요소이기도 했다. 송강호라는 배우와 장르, 그리고 조폭이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 이렇게 세가지만으로 [우아한 세계]라는 영화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었던 나로서는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가슴 한 켠에서 밀려오는 강한 울림 때문에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킬 수 가 없었던것 같다. 그만큼 영화 [우아한 세계]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제목과 소재와 같이 관객들에게도 아이러니컬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력적인 영화이다.
검은 양복차림에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인상의 한 중년남성이 있다. 얼핏 보기에도 조폭을 연상시키는 그 남자의 직업은 역시나 조폭이다. 억지로 손가락을 펴서 계약서에 서명을 시키고, 검은 양복차림의 똘마니들을 줄줄 이끌고 다니는 것이 영락없이 조폭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이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부인의 잔소리에 일일이 신경쓰고, 사춘기 딸에게 무시당하고 꼼짝 못하는 모습이 왠지 안쓰럽기까지 하다. 영화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인 ‘강인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습의 조폭과 다를바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인구의 모습은 앞서 생각했던 조폭에 대한 이미지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폭력을 행사하고, 날카로운 인상으로 위협을 해도 관객들에겐 그 모습이 안쓰럽고, 때론 편안하기까지 한것이다. 바로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 강인구는 조폭이 아니라 ‘조폭’이라는 이름의 직업을 가진 우리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영화 [우아한 세계]는 강인구라는 주인공을 통해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남편으로서의, 남자로서의,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한 인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강인구의 직업인 조폭이라는 설정은 그러한 다양한 모습을 지닌 우리들의 아버지가 처한 현실을 더 애처롭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여지도록 해주는 장치가 되어준다. 조폭으로서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 치열하고 냉혈한 현실에 부딪혀서 자신의 의지보다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그 현실과 맞닥뜨리는 이 시대의 애처로운 아버지들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 들어있다. “누군 싸우고 싶어서 싸우나...하루에도 몇 번씩 뒤에서 누가 찌르지나 않을까 돌아보고 그래...” 극중 인구의 대사처럼 가족들을 위해 현실과 부딪혀 싸울 수 밖에 없는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 그 자체가 보여지는 것이다.
“이런데 마누라하고 딸하고 보여주면 좋아할텐데...” , ...“고기만두요..김치만두는 안먹어요. 우리 딸은 고기만두밖에 안먹어..”
극중 인구의 대사들이다. 영화속 인구의 대사 하나하나에도 베어있지만 인구에겐 다른 무엇들보다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애정으로 가득차 있다. 새로 이사 갈 집을 둘러보면서도 다른 것보다 딸과 아내를 먼저 생각하던 모습, 딸에게 주려고 고기만두를 사가는 아버지의 모습과 대사 하나하나에서 가족들에 대한 애정이 크게 묻어난다. 비록 남들에겐 직업이랍시고 떳떳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부인에겐 언제나 골칫거리요, 딸에게는 없어졌으면 하는 부끄러운 존재지만 인구에게 있어 가족이란 자신보다 더 중요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빠가 창피하다며 항상 무시하고, 외면하는 딸 희순이의 모습이나 그런 딸 앞에서 항상 미안해하고, 작아지는 인구의 모습은 마치 나의 모습과도 닮아 있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언제나 바라기만 하고, 투정만 부렸지만 정작 아버지의 고민에 대해선 생각지도 못하고, 따뜻한 한마디 조차 건네지 못한 그런 무관심한 자식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족들 앞에선 힘든 내색 조차 보이지 않는 인구, 아니 우리들의 아버지 때문에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큰 놈은 캐나다에 가있고...딸도 지 오빠 따라서 캐나다 가고 싶어하는데 안해줄수도 없고...” “누구는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지 아나...하루에도 몇 번씩 뒤에서 찌르지나 않을까 돌아보게 되고...”
영화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인 강인구는 앞서 말했듯이 조직 폭력배이다. 그 때문에 부인에겐 언제나 걱정거리이고, 딸에게도 당당한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인구에겐 가족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조폭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구의 대사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보복에 대해 두려워하고, 손에 피를 묻힐 수 밖에 없는 일이기에 스스로도 평범한 삶을 선택하려 하지만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런 인구를 도와주지 않는다. 심지어 속마음 모르는 가족들까지 바라기만 할 뿐 그런 인구의 고민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한다. 인구에게 있어 조폭이란 여느 아버지처럼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가족들의 바램을 들어주기 위해 필요한 직업이다. 그것이 다만 무섭고 위험한 일이기에 인정받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우아한 세계]를 보는 관객들은 인구의 모습이 더 애처로워 보일지도 모른다. 공사장 싸움판에서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가슴으로는 가족들을 생각하는 인구의 안타까운 현실이 마치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열하고 냉혹한 현실 속에서 오직 가족들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조폭이라는 설정으로 극단적이고 날카롭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극중 강인구의 현실이 묻어나는 대사 하나하나와 행동 하나하나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단 한시도 현실 속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기에 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이다.
[우아한 세계]라는 영화는 단연 송강호라는 이름 세글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여러 영화들을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우리나라 대표배우 송강호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보여준 “강인구”라는 캐릭터는 그 어떤 영화 속 캐릭터보다 관객들의 마음 한구석에 큰 여운을 남겨준다. 이미 [효자동 이발사]나 [괴물]을 통해 자식과 가족들에게 누구보다 헌신적인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해온 송강호이기에 아버지라는 이미지가 크게 와닿는다. 무엇보다 영화 [우아한 세계]는 사실적이고 솔직한 송강호의 연기로 인해 영화가 말하려던 속의미를 가슴 깊게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다. 부인의 잔소리와 딸의 신경질적이고 무시하는 태도 앞에서 한마디도 못하고 쩔쩔 매는 모습이나 그런 가족들이지만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어하는 모습까지 송강호는 영화 [우아한 세계] 속에서 그야말로 지금 아버지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뿐만아니라 송강호는 강인구라는 한 캐릭터를 통해 이 시대의 아버지로서 모습과 함께 아버지로 살아가는 남자들의 모습, 그리고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까지 다양한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가족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인구의 모습이나 친구인 현수와 실없는 장난을 치던 인구의 모습에서는 아버지로서의 강인구와는 사뭇 다른 인간으로서의 강인구가 느껴지기도 한다.
전작인 [연애의 목적]을 통해서 남녀 사이의 연애감정을 솔직하면서도 담백하게 그려낸 한재림 감독은 이번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역시 특유의 솔직하고 사실적인 대사와 표현들로 관객들로 하여금 가슴 한 켠에 강한 메시지를 던지는 동시에 작은 울림을 이끌어 낸다. 자칫 거부감이 들수도 있는 주인공이 조폭이라는 설정을 오히려 주제와 메시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요소로 만들어 낸 사실이 놀랍기까지 하다. 또한 송강호라는 좋은 연기자의 멋진 연기가 더해져 참 매력적인 영화로 다가오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참 인상적인 한 장면이 등장한다. 앞에서도 몇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이 한 장면이 [우아한 세계]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여실하게 드러나 있는지도 모른다. 때론 외롭고, 힘겨운 현실에 대해 원망도하고, 대들어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러한 현실에 스스로 수긍하고 들어가야하는, 아니 스스로 그 현실을 수습해 나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연약한 아버지, 안쓰러운 아버지들의 모습이 가슴 찡하게 느껴진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그 누구도 현실 조차도 도와주지 않지만 언제나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세계를 꿈꾸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에게 크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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