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 부여의 연속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경사스러운 일이라도 정작 당사자는 별 것 아닌 일로 넘기는 경우가 있는 반면, 객관적으로 별 것 아닌 일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는 거기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어떤 일에 대한 철저히 주관적인 의미 부여 속에서, 우리는 별 것 아닌 일에 기뻐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반대로 별 것 아닌 일에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주저앉기도 한다.
숫자도 그런 의미 부여의 대상 중 하나다. 사실 대단한 의미 부여가 필요없는 한낱 기호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마치 미신처럼 우리는 수시로 숫자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는 한다. 로또에서 숫자 하나 차이로 희노애락이 갈리기도 하고, 우연히 시계를 봤는데 "4시 44분"이면 부정타는 것 아닌가 내심 의심을 해보기도 한다. 영화 <넘버 23>은 이렇게 우리가 습관적으로 숫자에게 의미 부여를 하는, 불명확하지만 흥미로운 소재에 접근한 영화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23"이란 숫자가 꽤나 흥미롭게 작용하는데, 그 설정이 과연 영화까지 흥미롭게 만들었을까?
동물보호센터 직원으로, 아내와 아들을 둔 가장으로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남자 월터(짐 캐리). 그러던 어느날 일때문에 아내 아가사(버지니아 매드슨)와의 생일기념 약속에 늦게 되고, 그 사이 아내는 책 한 권을 발견하고는 재미있겠다며 사자고 한다. "넘버 23"이라는 제목의 책. 성화에 못이겨 책을 사 온 뒤, 월터 역시 그 책에 왠지 모르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어린 시절과 장래를 정하게 된 계기 등 책 속에 나온 내용 하나하나가 월터의 삶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마치 자신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책을 읽어나가는 월터. 그런데 책을 읽던 도중에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하니, 바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대로라면, 아직 한번도 누군가를 죽여본 적이 없는 월터 역시 살인을 할 거라는 얘기. 자신의 과거는 물론이요 미래까지 서술하고 있는 듯한 책에 사로잡혀 월터의 마음은 갈수록 혼란스러워진다.
이 영화에서 짐 캐리는 그동안의 개그 기운을 싹 걷어낸 채, 아니 기존의 진지한 영화들에서 보여 온 최소한의 유머감각도 지워버린 채 분열증 내지는 편집증에 시달리는 심각한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연기를 하는 짐 캐리가 낯선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사실 짐 캐리는 은근히 이런 분열증이나 편집증 연기에 능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가 보여준 코믹 연기 가운데에서도 상당 부분 이런 면모가 많이 드러났는데, <마스크>(초능력이긴 하지만 거의 정신분열에 가깝다), <케이블 가이>, <미, 마이셀프 & 아이린>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그러고 보면 짐 캐리에게는 오히려 <트루먼 쇼>, <이터널 선샤인>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연기하는 게 가장 큰 변신인 듯하다) 아무튼 현실에서의 평범한 월터와 그가 읽는 책 "넘버 23" 속의 비범한 등장인물 "핑거링"의 1인 2역을 능숙하게 연기해내며 다시금 코미디 배우가 아닌 연기파 배우임을 입증했다. 더불어 짐 캐리의 상대역인 버지니아 매드슨 역시 현실에서의 아가사와 책 속의 "파브리지아"를 동시에 연기해내며 선량한 금발 여인과 팜므 파탈적인 흑발 여인의 전혀 다른 이미지를 전혀 다른 두 배우처럼 훌륭히 소화내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조엘 슈마허의 작품들은 완성도나 극적 재미에 있어서의 부침이 꽤나 심한 편이다. <사랑을 위하여>, <유혹의 선>, <의뢰인>, <타임 투 킬>, <폰부스> 등 꽤 준수한 영화들도 많이 만든 한편, <배트맨 & 로빈>, <배드 컴패니> 등 실망스러운 작품들의 경우는 거의 "졸작"에 가까운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짐 캐리의 변신때문에 거듭 기대가 되면서도 조엘 슈마허의 연출력이 이번엔 어느 쪽으로 향할까 하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던 것도 사실인데, 이 영화의 경우는 그 방향이 확실하게 갈리는 건 아니지만 아쉽게도 후자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일단 설정은 이보다 환상적일 수 없다. 영화가 시작하며 등장하는 숫자 23에 얽힌 각종 사실들이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펼쳐지면서 관객들의 관심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불만, 오프닝 크레딧의 배경은 온통 하얀데 자막까지 하얗다니... 자막을 보란 얘긴지 보지 말란 얘긴지;) 그리고 초반부만 해도 현실의 월터가 책을 읽으며 떠올리는 책 속 장면(혹은 자신의 과거)가 독특한 촬영기법과 함께 보여지면서 액자식 구조로 전개되며 꽤 흥미로운 전개를 할 것처럼 자세를 잡는다. 여느 헐리웃 스릴러가 어느 정도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월터의 현재 삶과 책 속 주인공 "핑거링"의 삶, 그리고 월터의 과거가 겹쳐지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나름 집중력을 요구하며 두뇌플레이를 하게끔 유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처음의 시도도 잠시뿐.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면서 스릴러가 줘야 할 심리적, 정신적 긴장감이 흐려진다. 비단 결말의 반전만이 문제는 아니다. 설사 반전이 별 것 아니라고 해도 전개과정에서 얼마든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줄 수 있다. 조엘 슈마허 감독의 전작인 <폰부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결말이 얼마나 뒤통수를 치느냐는 차치하고라도 주인공이 전화부스 안에서 그 짧은 시간동안 맞닥뜨리는 온갖 예측불허의 사건들이 얼마나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던가. 하지만 <넘버 23>은 그런 일관된 긴장감이 없다. 짐 캐리의 노련한 1인 2역 연기는 물론 칭찬해 줄 만하지만, 기왕에 주인공을 혼란에 빠뜨릴 거 제대로 혼란스럽게 하며 망가뜨리면서 관객들까지 <샤이닝>의 잭 니콜슨을 향한 감정처럼 종잡을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했다면 좋았을 것을, 이 영화는 그것에는 소홀히 한 채 안전한 이야기 전개 구조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스릴러에서 이야기 전개가 안전하다는 것은 즉 신선도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뜻이다.
월터가 책 속 주인공의 삶과 자신의 삶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면서 숫자 23을 매개로 자신의 삶을 맞춰보는 모습은 영화 속 아가사의 말마따나 억지스럽다. 그러던 중에 본격적으로 이 책을 누가 썼는가를 찾아나서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전개의 스릴러라기보다는 단순히 책의 주인을 찾아나서는 자그마한 모험 정도로 그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렇게 영화는 꽤나 흥미로운 설정과 심리적으로 효과적인 압박감을 줄 만한 세 시점의 이야기를 펼쳐놓고도 설정에 다소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맞추려 애쓰고, 여러 부분으로 펼쳐놓은 이야기가 싱겁게 귀결되면서 스릴러로서의 생동감은 일찍 맥을 잃고 만다. 결말의 반전을 보면서 살짝 놀라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다소 뻔한 반전이기도 하며 더구나 결말에 가서는 스릴러가 어느 정도 건네줘야 할 파격적 결말마저도 접어버린 채 어울리지 않게 훈훈하게 끝을 맺는다. 다만 다소 식상할 수 있는 반전이라도, 앞서 전개된 내용들과 연결시켜보면 어느 정도 개연성 있게 매치가 되어서 쉽게 납득은 가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기다리면서 <폰 부스>와 같은 미덕을 지닌 스릴러가 되길 기대했지만, 작품간의 부침이 심한 조엘 슈마허 감독은 이 영화 <넘버 23>을 잘 만든 영화라기보다는, 살짝 못 만든 영화 쪽으로 치우치게 해 버렸다. 최악의 영화라고 분개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보고 나서 마냥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특정 숫자를 소재로 풀어나간다는 것과 그 숫자가 공교롭게도 현실에서 꽤나 많은 사례를 낳았다는 부분에서 이 영화가 설정 하나는 정말 캐치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흥미로운 소재를 너무 단조롭게 전개해버렸다. 설정을 너무 믿은 탓일까, 아니면 설정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그 틀에 갇혀버린 걸까. 아무튼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 주변에 다가선 여러 숫자들을 한번쯤 다시 쳐다보게 하는 것 정도로 이 영화로부터 얻는 의미는 만족해야 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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