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쏜 총알이 버스의 창을 뚫고 여자의 어깨에 박힌다.
여자는 모로코의 한 마을에서 신음하고, 그녀의 남편은 구급차를 기다리며 전화통과 씨름중이다.
부부의 아이는 보모와 함께 멕시코의 국경을 넘고,
총의 원래 주인이었던 일본 남자(야쿠쇼 코지)는 농아인 딸을 시내에 바래다준다.
장난삼아 쏜 총알이 네 개의 국가를 관통하며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영화는 언어와 소통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1. 총상을 입은 미국인 부인은 모로코의 사막에서 그들의 원시적인 응급조치를 못미덥다는 듯 바라본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선 어떠한 미디어도 통용되지 않고, 남편의 다급한 전화는 언어의 벽보다 두꺼운 환경적 요인 (국제,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끊겨버리고 만다. 관광객들은 테러에 대한 공포와 각자의 안전만을 지키는 이기심으로 환자를 낯선 곳에 버려둔 채 도망친다.
낯선 환경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던 아내는 모로코의 늙은 여인의 손길에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부부는 그 곳에서 언어를 뛰어넘는 소통을 경험한다.
2. 두 소년이 있다. 그들의 아버지는 별 다른 경고 없이, 늑대를 쏘라며 총을 건넨다.
겁 많고 굼뜬 형은 총 한 발 제대로 쏠 줄 모른다. 영리한 동생은 대범하게 총을 쏘고, 툭 하면 형을 무시한다.
사춘기 소년은 돌로 쌓은 벽 틈으로 자신의 누나를 훔쳐본다. 소녀는 동생이 자신을 훔쳐보는 줄 알면서 옷을 벗고, 그들은 작은 틈새로 비밀스런 교감을 나눈다. 무지한 부모와 문명과 철저히 단절된 사막 한 가운데서 아이들은 어떤 것이 죄를 짓는 것인지, 위험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장난삼아 쏜 총알은 소년을 테러범으로 만들고, 경찰의 위협을 알아들을 길 없는 형은 총에 맞아 죽고 만다.
그들의 얼굴은 테러범이라는 부제 하에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소년(3세계 국가의 약자)과 세계와의 소통은 인간적 교감 없이 아나운서의 짧은 뉴스로 전달 될 뿐이다.
3. 미국인 부부의 어린 자식들은 보모와 함께 국경을 넘고 있다. 보모의 아들 결혼식 때문이다. 부부의 사고로 인해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진 보모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로 향한다. 시끌벅적한 결혼식을 구경하며 새로운 문화를 접한 이 미국 애들. 이들은 또래의 멕시코 아이들과 언어 없이도 즐겁게 어울린다. 저녁이 다 돼서야 보모는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이들을 태우고 가던 삼촌과 경찰이 시비가 붙는다.
경찰은 백인 아이들과 함께 있는 멕시코 인을 불법체류자로 의심하고
이들의 대화는 상하관계에 따라 철저히 단절되고 만다.
4. 일본에서 농아인 소녀가 뉴스를 통해 테러 소식을 접하고 있다. 어머니의 자살로 마음의 문을 닫은 농아 소녀는 말을 건넬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갈증을 느낀다. 미국인 테러 사건에 사용된 총이 그녀의 아버지 소유였기 때문에 그녀는 형사와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된다.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소녀는 몸을 통해 형사(혹은 낯선 남자)와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는 소녀에게 내면으로 소통하는 법을 일깨워준다.
이 순진한 형사는 소녀의 집에서 나와 혼자 술을 마시며 상념에 젖어있다. 그 순간 배경음악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상업적 특성이 다분한 동양적 멜로디가 흐르고
일본의 국민배우이자, 할리우드전문 일본배우 야쿠쇼 코지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소녀는 벌거벗은 채 일본의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카메라는 멀어지며 도시 전체를 비춘다.
(감독은 동양(일본)을 미지의 정글쯤으로 인식하는 듯)
미국인 부부 테러 사건의 전말을 뉴스로 방송하며 영화는 끝을 맺던가.
참 노골적인 제목이다. 네 개의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것은 언어의 부제다. 이들은 소통에 목말라하지만 자극성 짙은 미디어와 이익만을 따지는 국제질서에 대화는 번번이 무너지고 만다.
문제는 단지 그 뿐이라는 거다. 정치적 입장인 입장을 대입하며 수박겉핥기 식으로 인간적 소통에 접근 하는데,
말의 언어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되는 언어는
이런 교과서적 교훈으로는 느껴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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