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medigate.net의 "Cinema Paradiso"에 게재된 것입니다.
원문출처 http://www.jasonlee.pe.kr
'바벨'은 독립된 몇 개의 이야기들로 시작한다. 모로코의 사막, 미국의 로스 엔젤레스, 멕시코의 시골 마을, 일본의 도쿄를 배경으로 하는 세 가지 이야기는 마치 아무런 관련도 없는 듯 제각기 진행되며 각각의 토막 난 씬들은 혼란스러운 듯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각 씬들의 배열은 매우 계산적이며, 결국 하나의 서사 구조에 편입된다. 이는 이냐리투 감독이 일관되게 사용해 온 퍼즐 맞추기식 편집이며, ‘바벨’에서도 사용되어 내러티브 구조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룬다.
‘바벨’에서의 씬들은 21그램에서처럼 짧지 않고 호흡이 길다. 또한 시간적인 설명이 필요할 때 마다 영화 속 매스 미디어라는 방식을 통하여 플래쉬 백 혹은 플래쉬 포워드를 삽입하여 혼란스러움을 줄였다. 하지만 다양한 방법, 즉 모로코의 사막에서 뛰어가는 아이들과 로스 엔젤레스의 집 안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병치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문화적 차이의 충돌’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21그램에서와 유사하게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기술적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한다. 전체적으로는 에너지가 넘치는 ‘아모레스 페로스’나 ‘21그램’의 난삽함에 비교하면 ‘바벨’은 훨씬 이해가 쉽고 여유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적인 힘이 결코 전작들에 뒤지는 것은 아니다. 차분한 영상들이 주는 깊이 있는 여운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결말을 고려하더라도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성경에서의 바벨탑은 다른 언어에 의한 의사 소통의 상실을 의미한다. 비록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 ‘바벨’을 자세히 살펴보면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리쳐드(브래드 피트 분)와 수잔(케이트 블란쳇 분)은 대화를 통하여 결코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유제프에게는 언어란 경찰을 속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며, 치에코에게는 자신이 농아라는 사실을 넘어서는 소통 부재가 아버지와의 사이에 존재한다.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미국인 관광객들은 곤경에 빠진 수잔과 리쳐드를 버리고 달아나 버리지만 오히려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모로코 사막 마을의 주민들과는 협력과 이해가 가능하다. 이렇듯, 인류가 ‘지식 전달의 수단’으로 무한한 가치를 두는 언어가 개인 간의 진정한 소통에서는 무용지물이 되는 아이러니함을 ‘바벨’은 표현하고 있다.
결국 ‘바벨’이 제시하는 진정한 소통의 방법은 같은 언어의 사용이 아니다. ‘언어의 대부분은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기 위해 사용된다’는 어느 언어학자의 말은 ‘바벨’에 의해서 큰 힘을 얻는다. 결국 인간은 말보다는 마음과 몸과 행동으로 느끼는 비언어적인 소통에 의해서 진정한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바벨’은 주장한다. 여기에 더하여, 이냐리투 감독은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것과 같이, ‘소통의 부재와 고독’이라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관을 제시한다.
주제로서의 ‘가족의 소중함’은 젊고 패기에 찬 멕시코 출신 감독이 내세우는 결론으로는 다소 진부한 듯 하며, 편안한 해피엔딩은 다분히 헐리우드적이다. 그렇지만 메시지를 보여주는 그의 영화적 표현력은 분명 남다르다. 총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아내와 그의 소변보기를 도와주는 남편이, 그리고 혼란스러운 딸 치에코와 아버지가 맞잡은 손이 클로즈 업 될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소통의 회복’이라는 의미전달을 훨씬 뛰어넘는 감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벨’은 진지한 주제와 영화적인 감동이 잘 조화된 역작임을 부정할 수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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