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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린 가장 가혹한 형벌 바벨
jimmani 2007-02-25 오전 2:05:34 1644   [6]

흔히 인간을 일컬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물론 식인동물이나 심지어는 식인식물들까지도 곳곳에 존재하긴 하지만, 대체로 지능이나 사고력에 있어서 동식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근거로 인간을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한 생물이라 여기는 것이 우리 모두의 생각일 것이다. 동식물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온갖 일들을 인간은 척척 해내기에, 그런 능력을 지닌 인간들은 종종 자신들을 단순히 동식물보다 우월한 존재만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나 마찬가지라고 여기기도 한다. 신은 없다고 믿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닌데, 뭐.

하지만 만약 신이 있다고 가정할 때, 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신의 입장이라면 우리도 다른 동식물과 다름없는 똑같은 창조물에 지나지 않다. 그런 입장에서 내가 만물의 영장이라며 까부는 인간의 모습을 신이 본다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일까. 이 영화 <바벨>은 이렇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이런 힐난을 가할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수많은 창조물에 불과할 뿐인 인간이, 어쩜 이렇게 무지하고 가혹할 수 있는가라고.

모로코에 사는 염소치기 두 형제가 아버지로부터 자칼을 잡으라고 라이플 총을 받는다. 3km까지 나간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두 형제는 재미삼아 3km 거리의 목표물을 쏴보기로 결정하는데, 그 목표물은 바로 지나가던 버스. 혹시나 하며 쏜 총이지만 총알은 정말 버스에 맞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 버스는 급정거를 한다. 한편 미국 샌디에고 어느 집에는 부모가 여행을 간 채 마이크와 데비 두 아이들과 멕시코 출신의 보모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만 집에 있다. 아멜리아는 곧 아들의 결혼식이 있어 멕시코로 가야 하는데, 주변에는 마땅히 아이들을 대신히 돌봐줄 사람들이 없다. 결국 아멜리아는 두 아이들을 조카 산티아고(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와 멕시코에 함께 데리고 가고, 그 여정은 순조로운 듯 싶었지만 예상치 못한 위기에 봉착한다. 한편, 모로코로 여행을 왔지만 왠지 분위기가 싸늘한 듯한 미국인 부부 리처드(브래드 피트)와 수잔(케이트 블란쳇). 관광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 수잔이 바깥에서 갑작스레 날아온 총알에 맞고 만다. 과다출혈로 시간을 지체했다간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 근처 마을에서 잠시 안정을 취하며 구급차를 기다리지만 쉽지 않다. 총격 사건은 순식간에 양국간 외교 문제로까지 퍼지고, 그저 구조의 손길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는 부부의 바람은 갈수록 꼬여만 간다. 한편, 일본에는 청각장애인 소녀 치에코(키쿠치 린코)가 있다. 자신과 잘 통하던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 야스지로(야쿠쇼 코지)와 단둘이 살고 있지만 둘 사이는 여전히 서먹서먹하기만 하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아버지와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치에코는 돌발적인 행동들로 반항심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야쿠쇼 코지 등 세계 각국의 유명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이들 각자의 연기 모두 알차다. 네 가지 이야기가 전개되고 등장인물도 많다보니 각 배우들 모두가 주연임에도 불구하고 비중이 크지만은 않아 마치 조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출연분량과는 상관없이 배우들 모두가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들 가운데 케이트 블란쳇과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야쿠쇼 코지 등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가운데,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사람은 세 사람, 브래드 피트와 아드리아나 바라자, 그리고 키쿠치 린코였다.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 내내 자신의 그 훤칠한 외모를 단 한번도 내세우지 않는다. 회색빛으로 물든 머리와 수염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반질반질한 섹시함보다는 살면서 겪어온 깊은 고민들이 오래 묵혀있는 듯하고, 그런 탓인지 그가 펼치는 대사와 감정 연기는 그가 여태까지 나온 영화들 중 가장 무겁고 깊다. 아는 사람 없는 타지에서 아내가 총에 맞은 채 생사의 문턱을 왔다갔다해야 하는 현실을 보며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는 남자의 모습으로서, 브래드 피트는 그 상처받은 내면을 놀라울 정도로 잘 연기해낸다. 특히 병원에서 아들과의 전화 도중 눈물을 쏟는 장면은, 말빨이나 현란한 제스처 없이도 굵고 진한 눈물만으로도 관객들의 가슴을 울릴 줄 아는 능력이 그에게도 있음을 증명한다. 배우가 나이 들어가면서 그 능력 또한 진국을 더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브래드 피트가 흔히 알고 있던 배우의 재발견이라면, 아멜리아 역의 아드리아나 바라자와 치에코 역의 키쿠치 린코의 경우는 어디서 저런 보석이 숨겨져 있었나 싶은 발견의 즐거움이다. 풍채좋은 아줌마같은 인상을 소유한 아드리아나 바라자는 이 영화에서 미국인 아이들을 돌보며 착하게 살아왔지만 만만치 않은 세상 앞에서 지치고 마는 멕시코 여인의 모습을 중견배우다운 묵직한 에너지를 통해 보여주었다. 일본배우들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축에 속한다는 키쿠치 린코 역시 이 영화에서 그동안 숨겨왔던 존재 가치를 증명이라도 하듯 대담하고 용감한 연기를 펼쳤다. 청각장애를 앓는 소녀로서, 사춘기의 욕망과 주변의 편견을 동시에 감내해야 하는 힘든 내면을 강렬한 표정과 거리낌없는 행동을 통해 용감하게도 잘 표현해내었다. 분명 하기 힘든 연기였을텐데도, 그녀에게선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이고 담대한 면모가 그대로 느껴졌다. 더불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모로코 현지 주민의 힘겨운 일상을 눈물겹게 소화해낸 어린 두 형제와 아저씨들에게도 이름은 모르지만 박수를 보내고 싶다.

140분에 가까운 긴 러닝타임동안 네 가지 이야기가 교차되어 전개되기 때문에 다소 보기에 힘들 수 있지만, 다행히도 감독은 관객들을 어느 정도 배려한 듯 예상보다 친절한 전개를 펼쳐나간다. 장소와 시간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게 아니라 네 가지 사건이 정해진 순서대로 번갈아 나와서 각 이야기들의 전개를 머리 속으로 어느 정도 정리만 하면 어렵지 않게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물론 네 이야기가 동시에 벌어지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시간차가 있긴 하다) 거기다 이 정도면 끝나겠다 싶은 부분에서 끊지 않고 궁금증이 증폭될 시기에 확 끊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감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키면서 긴 러닝타임동안 집중력이 쉽게 분산되지 않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렇게 모로코, 멕시코, 미국, 일본을 오가며 네 가지 이야기를 교차 전개해가며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음미해 볼 때, 영화의 주제의식이 얼핏 작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던 <크래쉬>와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인종과 계층간의 사람들의 갈등과 화해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미국 내 사회의 특이성을 염두에 두며 거기서부터 발생하는 고유한 갈등을 중심으로 삼는다면, <바벨>의 경우는 다양한 국가를 가로지르는 만큼 보다 보편적인 갈등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특수한 나라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는 갈등을 조명하고 있기에 더 가슴에 와닿고 더 소름 끼친다.

다른 인종과 다른 언어 위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다른 관념과 문화를 더 세워놓는다. 피부색과 언어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다른 이들 사이가 처음부터 원만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소통의 벽을 허물어보려고 노력해보지는 않을 망정, 더욱 굳건히 하며 경계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 과정에서 애로사항을 겪는다. 리처드는 총에 맞은 아내 수잔을 일분일초라도 빨리 구하고 싶지만 중동마을은 안전치 못하다는 관광객들의 반응과 모로코 구급차는 안전치 못하다는 미국 정부의 반응은 그런 그들의 바람을 자꾸만 지연시킨다. 멕시코로의 여정 중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난 아멜리아에게 기다리는 것은 단지 그녀가 불법체류자라는 것만으로 다른 거 보지 않고 잡아가 추방시키기에 바꾼 경찰들의 신속한(?) 대책만이 남을 뿐이다. 치에코는 다른 건 다 멀쩡함에도 단지 귀가 안들려 말을 제대로 못한다는 이유로 남자들로부터 괴물취급을 받고, 여기에 좌절하며 자신을 더욱 망가뜨려간다. 성선설을 믿는다면 뭔가 단절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어보려 노력해야 하는 게 사람의 도리이건만, 되려 단절된 틈에다 벽을 쌓아 그 단절을 더욱 고착화시키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성선설이 마냥 통하는 이론만은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의 제목도 품고 있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신의 권위에 도전하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에 분노한 신이 그 벌로 사람들에게 다른 언어를 줌으로써 말이 통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신의 형벌이 과연 다른 언어를 주는 것만으로 끝난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다른 언어를 가짐으로써 인간은 그보다도 더 참혹한, 아마도 신이 인간에게 내린 벌 중에 가장 참혹할지도 모를 형벌을 얻었다. 그것은 칼과 총보다도 무서운 사람들 간의 단절과 불신이다. 신이 형벌이라고 나눠준 여러 언어들을 받아들인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벌인 줄도 모르고 그 위에다가 더 굳은 장벽을 하나씩 쌓아올려갔다.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 그 위에 그로 인해 비롯되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편견과 의심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형벌을 더욱 가혹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타인과 나를 가르는 굳건한 벽을 쌓아만 갔고, 그것은 결국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사태들로 인해 비로소 끔찍한 형벌이었음을 드러냈다. 굳게 닫힌 외교 문제로 인해 아내의 목숨을 잃을 위기에까지 처한 리처드도, 순간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장난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은 유세프와 아흐메드 형제도, 단란할 줄만 알았던 여정에서 예상치 못한 시련을 만난 아멜리아도 모두, 이런 불신과 편견의 형벌로 인해 고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더 가혹한 것은, 이렇게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참혹한 세상의 단면에 대해 사람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타인을 향한 불신과 편견을 퍼뜨려간다. 그 상처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도 모르고. 영화는 전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넓다고 얘기하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세상은 매우 좁아서, 내가 한번 날린 화살은 얼마되지 않아 나 자신에게 금방 돌아온다고 경고한다. 가혹한 단절 앞에서 눈물 흘리는 영화 속 인물들 또한 그런 부메랑의 희생양들이다. 미국 정부의 막무가내 외교정책의 허울로 인해 미국 시민 중 한 사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고, 남에게 불행의 씨앗을 아무렇지 않게 갖다준 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스란히 그 불행을 다른 형태로 되돌려받는다. 영화는 "세계는 넓다"는 말을 무색하게 할 만큼 드넓은 세계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불행의 씨앗을 마치 옆집 이웃처럼 서로 주고받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이렇게 사람들 간의 거리가 가까운 현실에서 그 곁에 벽을 쌓아둔다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숨막힌 일인가를 묻는다. 그 답답한 벽 사이로 서로에게 흠집을 내고, 다시 그 상처를 되돌려 받으면서 점차 곪아가는데도 정작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다는 걸 모르는 무신경함. 신이 있다면 자신의 형벌로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고통을 받을 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 가장 가혹한 형벌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형벌이 자신에게 언젠가 돌아올 것임이 분명한데도 그걸 모르고 여전히 누군가에게 그 형벌을 가하고 있는 것이고.

물론 영화는 그 가운데에서도 마냥 비관적인 모습으로 일관하지는 않는다. 다른 인종, 다른 문화, 장애의 편견 속에서 신음하는 가운데에서도 그런 경계를 허물고 소통을 시도하는 이들은 늘 있다. 보모 아멜리아와 국경을 초월한 가족같은 정을 나누고, 멕시코에 가서도 모두 허물없는 친구처럼 부담없이 어울려 노는 두 아이들의 모습. 시각 장애를 앓고 있더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몸만 원할 거라는 편견이 없이도 충분히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줄 줄 아는 치에코와 형사의 관계. 어떤 부차적 요소도 지워버린 채 사람 대 사람으로서 관계를 다져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래도 그 오랜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그마한 희망이 어딘가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는 상처받고 있다. 사람은 언어로 소통을 하는 생물이건만, 그렇게 소통을 해보려 하기도 전에 알아서 귀를 막고 눈을 가려버리는 사람들의 편견과 불신은 얘기가 통해야 살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기가 너무나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 영화 후반부에 치에코는 형사에게 빼곡히 글이 적힌 쪽지를 남기고는 헤어진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그 쪽지에는 안그래도 말을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다 그런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봉쇄해버리는 사회의 시선때문에 더욱 말하기 힘들었을 치에코의 구구절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은 열어놓고 얘기를 해야 한다. 닫으려 해를 쓰지 말고.

영화 <바벨>은 소통과 단절이라는 매우 진지하고 무거운 소재를 갖고 있지만, 배우들의 진심어린 연기와 숨가쁘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에 힘입어 소재나 분위기가 암울하다 하더라도 부담없이 끝까지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 이후 감독이 만드는 "진실 3부작"의 마지막 편이라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진실이 뭔지 알 것 같다. 신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형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형벌을 더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 말이다. 언어가 다른 배우들이 함께 모여 만들었음에도 그 앙상블이 환상적인 이 영화처럼, 이 세상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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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2006, B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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