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게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무심코 파묻은 사건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얼굴에 상처를 내기도 하고 , 때로는 그 줄기에 내가 아끼는 사람이 목을 매고 죽을 수도 있다.
이미 지난 작품들에서 여러 등장 인물간의 소통의 문제를 주제로 삼았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감독은 26일 아카데미 시상식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 [바벨(BABEL)] 에서 더욱 좋은 솜씨로 네개의 이야기를 꿰매어 근사한 한벌로 지어 낸다. 모로코, 멕시코, 미국, 일본.. 연결고리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 네 나라에서 벌어지는 아래의 사건들은 놀랍게도 하나의 주제와 하나의 실마리로 이어진다.
1. 아프리카 모로코의 어느마을, 아버지는 양떼를 잡아먹는 쟈칼을 잡기 위해 어린 두 아들에게 엽총을 건네준다. 두 아들은 총을 시험해 본다며 멀리서 다가오는 관광버스를 향해 총질한다.
2. 미국인 부부(브래드피트,케이트블란체)는 막내가 죽은 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머나먼 아프리카 모로코로 외로운 여행을 오게된다. 둘 사이의 갈등이 좀 처럼 봉합되지 않던 중, 멀리서 날아온 총알이 부인의 목에 박힌다.
3. 미국인 부부의 아이를 돌보는 멕시칸 보모는 내일이 아들의 결혼식인데도 그 부부의 사고로 인해 휴가를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몰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4. 일본 동경의 한 소녀는 벙어리이다. 예쁜 외모와 부유한 환경에도 벙어리이기 때문에 늘 외롭다. 마음에 드는 남자들도 자신이 벙어리인걸 알고 손사래를 치자 결국 극단적인 소통의 방법을 찾는다. =====================================================================================
이 놀라운 영화는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깜짝 놀랄 반전의 모양새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 들여다 보면 이 영화의 주제는 바로 '바벨탑'으로부터 시작된다.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단 하나의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던 조상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하늘에 닿을 크기의 탑을 쌓기 시작한다. 이들의 교만함을 꾸짖기 위해 하느님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그들에게 각기 서로 다른 언어를 부여함으로서 바벨 프로젝트는 실패하고 모두 뿔뿔히 흩어지는 형벌을 받게 된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죽임과 멸시와 전쟁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그 모두가 어쩌면 언어가 다른데서 오는 문화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만일 세계가 모두 구약성경 시절처럼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면 분명 서로의 나라를 오가는 일이 수월해 질것이고, 그러다 보면 서로의 처지와 어려움을 터놓고 얘기하며 귀담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서로를 찌르고 다치게 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영화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두 가지 커다란 장벽에 부딪힌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모로코와 미국 사이에서, 멕시코 이민자와 미국정부사이에서,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서 넘지 못할 커다란 장애가 생길 뿐 아니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부부간에도, 형제간에도, 경찰과 범인사이에도 의사소통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언어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담아놓은 그림을 밖으로 표현하는 붓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언어가 같다고 해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신에게 왜 그렇게 내 맘이 전달되지 않을까요" 하고 고민해보면 마음은 결코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영화 [바벨]은 이러한 물음의 중심에 있다.
영화속의 네가지 사건들은 결국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타인들의 진심을 깨닫게 된다. 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주고 생채기를 후벼파는 아픔을 겪고서야 서로의 진심을 받아 들이게 되는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의사소통의 가로막힘을 걷어내는데 뭐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워야 하는가. 그냥 아프다고, 안아달라고, 보고싶다고 할 때, 그냥 어루만져주고 안아주고 만나주면 그 마음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닐텐데 왜 우리는 상대방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삐딱한 눈초리로 스스로 삐닥선을 타는가.
무턱대고 아랍인들을 두려워하는 미국인들, 가난한 멕시코사람이라면 한번 까뒤집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경찰들, 사사건건 형을 이겨보려는 동생, 벙어리라면 당연히 생각이 안통한다고 생각하는 비장애인들. 하지만 결국 이 영화에 등장하는 네가지 사건속으로 이러한 언어의 장벽과 마음의 장벽을 모두 뛰어넘는 한줄기 "희망"의 바람이 불어든다.
그것은 바로 언어와 국가와 신체장애를 뛰어넘는 서로의 "진심" 이다. 아우의 진심어린 눈물과, 아랍주민들의 정성과, 멕시코의 축제와, 소녀를 안아주는 형사의 마음은 모두 "진심"이다. 서로의 "진심"을 몰라주면, 비록 우리가 같은 시대, 같은 언어, 같은 장소에 산다고 해도 우리 모두는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이다. 우리가 쌓으려는 모든 것은 바벨탑이 되고 말것이다.
눈물을 쏙 빼놓고 극장을 나서며 한 동안 나는 벙어리가 되었다. 알면서 상처주고, 알면서 잰채하고, 다 알면서 내민 손 잡아주지 못했던 수많은 내 주변의 사람들. 그 들에게 머리 조아려 사과하고 싶다. 영화 속 멕시칸 보모의 말처럼 '나는 어리석었다' 고...
Filmania CRO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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