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감독이 99년의 '정'에 이어 다시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그의 전작인 정의 이미지가 너무 좋았기에.. 당연히 다음 작품도 기대되게 했었다.. 아름다운 사계절을 한 여인네의 일생에 맞추어 수려하게 담아낸 화면도 좋았지만.. 일단 집안의 붙박이나 장식품 취급당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낸 그 도전정신이 참 좋았다..
그런 그가 또다시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여지껏 사회성 짙은 작품들만을 해오다가 결혼을 계기로 좀더 소프트하고 감미로운 영화들로 선회하는 듯 싶더니.. 이번 작품은 180도 변한 스타일인.. 액션과 스릴러가 혼합되고 역사와 멜로가 가미된 작품이다.. 대충 시놉시스만 읽어보아도 이런 스타일의 전향이 놀라웠는데.. 또하나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이 있었다.. 8-90년대를 풍미하던 추리소설과 문제의식이 담겨진 사회소설을 써오던 작가 김성종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영화의 원작자였던 것이다.. 그의 소설 '최후의 증인'이 말이다.. 그래서 영화의 원제가 공식적으로 원래 'Black Narcissus'에서 'Last Witness'로 바뀐 듯 하다.. 원작자의 소설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가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 봤는데.. ^^;; 아무튼 영화계와 소설계의 두 거물급이 만난 영화이고.. 안성기, 이미연, 이정재 등의 배우들의 지명도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기대할만 했다..
6.25 전쟁이 끝나갈 즈음의 거제도.. 이 곳에는 남로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일을 물려받아 수행하고 있는 흑수선이라는 암호명의 손지혜와 그녀를 음으로 양으로 보살펴주는 머슴의 아들 황석이 함께 살고있다.. 그녀는 당의 지령을 받아 거제도의 포로 수용소의 한동주 일당의 탈출을 도와주게 되고 이로 인해 양달수에게 쫓기는 몸이 된다.. 결국 그들은 한동주와 합류하게 되고... 탈출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면서 궁지에 몰린 황석과 손지혜는 서로서로를 살리기 위해 최후의 방법을 선택한다.. 그리고 50년이 흐른 뒤 비전향 장기수로 50년의 독방생활을 마친 황석이 출감하게 되고.. 이 일과 연관이 있었던 양달수를 비롯한 일당들이 차례로 시체로 발견된다.. 수사에 나선 오형사.. 과거와의 연결 고리인 손지혜의 일기장을 찾아내면서 수사는 활기를 띠게 된다.. 점차 하나둘씩 단서가 발견된다.. 하지만 밝혀지는 과거는 우리의 암울한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해서.. 맘이 편치만은 않은데..
영화는 역시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러웠다.. 두 거장의 색채가 적절히 배합된 영화였다.. 극을 풀어내는 방식은 김성종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긴장감과 스릴 위에 아련함이 살짝 베어나왔고.. 등장인물들간의 감정의 교류와 대립을 미묘하게 잡아냈다던가.. 굵직한 줄거리를 토대로 그 안에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사회문제라던가 왜곡된 역사를 살짝 꼬집는 비판을 삽입한 것.. 또 사진의 한 컷을 보는 듯한 수채화같은 영상을 담아낸 것은 배창호 감독의 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보는 내내 마음이 참 풍족해지는 기분이었다.. 요즘 하도 빨리 변하는 세대의 입맛에 맞추느라 하루에도 몇명의 스타가 탄생하고 사라지는 와중에.. 이렇게 든든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원로들이 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퍽 뿌듯한 일이라 생각했다.. 소설계의 대가 김성종과 영화 감독으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배창호.. 여기에 이제 그 깊이 패인 주름만으로도 자신이 맡은 인물을 표현해낼 수 있는 국민배우 안성기.. 이들의 만남이 이렇게 잘 어우러져서 그들의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기억될 작품을 만들었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물론 이 영화가 아주 완벽한 대작은 아니다.. 확연히 눈에 드러나는 실수들도 수두룩하고 이로 인해 실망스러운 졸작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우선 가장 큰 결점으로 드는게 스릴러물답지 않은 범인의 뻔한 노출이다.. 너무 빨리 쉽게 눈치챌 수 있기에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는 이유이다.. 하지만 평소 김성종의 소설을 즐겨 읽었던 독자라면 아마 알 것이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범인이 주인공으로 1인칭주인공시점에서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형사나 탐정이 주인공이 아닌 범인의 입장에서 왜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어떻게 될것인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특별한 전개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예 처음부터 범인은 노출되어서 극이 전개된다.. 뭐 심지어 범인이 직접 고백하듯이 쓰기도 하고.. 그 범인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기에 범인이 쉽게 드러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원작자의 색채를 고대로 살려 극을 전개시켜 나갔기에..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봐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그렇게 그 주인공의 입장에서 함께 생각하면서 느끼고 동화시키며 보다보면 아마도 극의 배경과 내용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것이다.. 부정적인 시각도 안갖게 되고 말이다..
뭐 영화를 수작이다 범작이다 졸작이다 구분짓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기에 더 왈가왈부할 수 는 없지만.. 본인의 게인적인 느낌으로는 이 영화에 상당히 만족한다..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 실수들을 덮어줄 만한 더 큰 장점들이 많은 영화이기에 고운 시선으로 보게 된 것이다.. 어릴적의 황석과 손지혜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마지막 장면만큼이나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이기에 아마도 오랫동안 기억할 작품이 될 것이다.. 아마도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