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따르면 과거 인간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대홍수 이후 인간은 신의 재앙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신의 영역인 하늘에 맞닿는 거대한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다. 신은 인간에게 물로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는 무지개를 약속했으나 인간은 이를 믿지 못하고 거대한 탑을 쌓는다. 이에 분노한 신은 인간에게 재앙을 내린다. 그 재앙은 바로 소통의 불협화음. 언어의 분리였다. 탑을 건축하던 이들은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결국 바벨탑은 붕괴된다. 지금 세계가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지 못하고 각각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그 바벨의 오만함 덕분이다.
물론 이는 성경말씀이다. 하지만 만약 세계가 하나의 언어를 쓴다면 과연 인류의 역사는 어떠했을까라는 논점하에서 이 성경말씀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지점은 의사소통의 단절에서 출발한다. 지난 수세기부터 근래까지 인간은 수많은 폭력과 갈등의 사례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갈등은 어디서 출발하여 어디로 나아가는가. 어쩌면 그것은 마치 인종과 국적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처럼 소통되지 않는 사고와 이념의 혼선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로코의 한 외딴집. 한 남자는 이웃으로부터 라이플 한정을 사들인다. 라이플을 산 이유는 염소떼를 공격하는 자칼을 잡기 위해서이고 그는 염소떼를 관리하는 어린 두 아들에게 총자루를 쥐어준다. 하지만 그 단순한 계기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게 번져나갈 줄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을 통해 확인된 것처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 감독은 무관계의 개개인을 교묘하게 하나의 관계로 엮어가는 이야기꾼이다. 이 영화는 하나의 사건이 점차 동심원을 넓혀가는 나비효과와도 같다. 작고 사소한 사건이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은 실로 놀랍다. 이는 단순히 플롯의 탁월함에 대한 감탄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범세계적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한민국이 타민족의 갈등을 실제로 체험할 기회는 많지 않다. 해외에 머물렀거나 특별한 일을 하는 이가 아니라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종간의 갈등이란 허가받지 않은 체험과도 같은 셈이다. 그런 우리에게 이런 류의 인종갈등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 간접체험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와 크게 무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지난 LA흑인 폭동 당시 우리 교민들이 받았던 피해는 결코 인종적 문제를 배제할 수 없는 사례이기도 했으니까. 우리도 어디서든 유색인종이라는 차별을 받아도 이상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린 소년들의 호기심과 장난끼가 발사한 총알은 마치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듯 먼 미국에서 관광을 온 수잔(케이트 블란쳇 역)을 관통한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발생된 유혈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지며 외교적 마찰로 자라고 정치적인 커넥션을 형성한다. 먼 이국에서 자국인이 피흘리는 동안 자국의 정치인들은 그 행위가 낳을 파생효과를 고민한다. 마치 무너져내린 무역센터가 이라크를 점령하게 만들었듯. 비악의적인 사건은 테러리즘으로 과장되고 악용된다.
사실 영화가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지난 9.11테러 이후 전면적으로 굵직해진 아랍과 서구의 대립-그것도 미국과의-이 보여준 파국 효과다. 한발의 총성이 미국인에게 총상을 입힌 순간 그것은 테러리즘이 되었고 정치적 응징의 대상이 되었다. 피흘리는 신음하는 개인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정치적 보복이 먼저 논의되고 추후 발생될 파급적 효과가 추정된다. 과연 미국은 9.11테러 이후 무엇을 얻었나. 대체 이라크는 왜 쑥대밭이 되었는가. 후세인은 죽었고 살상무기는 보이지도 않는다.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가를 상기시킨다면 현실은 참담하다. 그 사건의 발단이 지극히 어린 아이들의 무지한 장난탓임을 아는 관객들은 그 사건이 뻗어나가는 과정을 목도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통증을 대면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보다도 실리적 정치성이 먼저 구상된다.
모로코에서 일어난 날갯짓은 LA와 멕시코에 또다른 폭풍을 부른다. 여행을 떠난 부모를 대신해 두 아이를 돌보던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 역)는 멕시코에 있는 아들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두아이와 함꼐 국경을 넘는다. 그들을 데리러 온 산티아고(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역)는 어딘가 불안하다. 아들의 결혼식에 별탈없이 참석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아멜리아는 다시 LA로 향해 국경을 넘으려 한다. 그들은 결코 그곳에서 자신들이 어떤 참담한 결과를 맞이할지 전혀 알지 못한다.
모로코에서 빚어진 파국이 의도하지 않았던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어긋난 소통의 발견이었다면 멕시코와 미국 국경에서 벌어진 파국은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지 못한 자의 사연이다. 모욕적인 검문에 참지 못한 산티아고가 시동을 걸고 내달리는 순간 상황은 악화로 치닫는다. 결국 그 부당한 차별에 발길질을 함으로써 그 부당함이 정당함으로 뒤바뀌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것은 마치 부당한 행위자가 자신의 정당함을 밝히기 위한 비열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 수단에 이용당해버린 이의 어리석음이기도 하다. 이는 실제 보복성 테러리즘을 꾀하는 아랍세력들의 행동방침이 결코 옳은 결과를 낳지 못함에 대한 고찰이거나 하나의 실례이다. 그리고 그 결과적 피해를 얻는 것은 결국 그와 무관한 이들일 뿐이다. 그것은 9.11테러가 부른 전쟁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퍼부어진 미사일이 앗아간 죄없는 민간인들의 학살을 보는 것과 같다. 사막을 헤매는 아멜리아와 두 아이들은 결국 어떤 의지와도 무관한 제3의 피해자일 뿐이다.
이 사건은 일본까지 그 파문의 동심원을 확산시킨다. 사실 일본의 이야기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큰 구심점을 한다기보다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태도의 방점을 굳건히 다지는 수단이다. 또한 더불어 그 갈등을 바라보는 제3자의 시선을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라이플의 근원이라는 미약한 연관성은 그 사건과 무관한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자 모로코의 사건이 뻗어나가는 극한의 지점이다. 청각장애의 여고생인 치에코(키쿠치 린코 역)는 세상을 시선으로 소통한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치에코는 결국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이다. 이는 영화가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는 지점을 대변하는 것인데 결국 이 영화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인종과 국가같은 구분된 경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소통을 말이다. 치에코에게 호감을 보이던 소년이 그녀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그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을 통해 우리는 쉽지 않은 소통을 간단하게 포기해버리는 얄팍함을 발견한다. 또한 이는 이 세계가 미약하지만 어떤 가느다란 하나의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마치 도미노가 넘어지듯 모로코에서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 도쿄에까지 미치는 영향. 그것이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TV뉴스를 통해서 보게 되는 그 현상안에서도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접하고 영향받게 되는 것이다. 단지 먼 이국에 있는 제3자들에게 그런 현상은 그저 흘러가는 뉴스거리일 뿐이다. 이라크에서 누가 죽어가도 그것은 그나라의 현실일뿐 이땅을 사는 우리에게는 화면속의 정경이 되고 입에 오르다가도 금방 잊혀지는 일이 될 뿐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써 자신과 무관한 소통에 관심을 지니지 않는 보편화된 이기심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가 9.11이후의 미국인 심리를 은연중에 보여준다는 것인데 우발적인 총기사고에 의한 사건이 미국에 대한 테러로 인식되는 것은 그 이유에서다. 모로코를 여행하는 -혹은 아랍국가를- 미국인의 우발적인 사고가 테러로 둔갑되고 그렇게 이해되는 것은 미국의 정치적 의도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해되는 지점은 그들의 잠재된 공포에 대한 발견이기도 하다. 그들이 모로코의 한 마을에 들어서며 주변을 경계하는 것 역시도 그렇다. 그들에게 날아든 원인모를 총알 한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역센터의 붕괴가 있었던 그날의 공포를 다시 피드백시키는 것이다.
한 생명이 생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상황에서도 인간들은 국경의 문제를 논하고 절차를 따진다. 이는 마치 성경속에 나오는 바벨탑의 단죄를 보는 것만 같다. 인간의 존엄성은 교감되고 있는가라는 문제. 우리는 어째서 국경을 나누고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세우는가. 과연 인간이 인간으로써 하나의 교감을 나누는 건 불가능한 일인가. 이 영화는 그 인간이라는 명제 그 자체의 동질성을 반하는 우리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제 우리는 바벨탑을 세우지 않았을지라도 그 바벨탑의 단죄를 받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각자의 마음속에 오만한 자기중심적 바벨탑을 세우고 있기때문이다. 크게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배제를, 작게는 너와 나라는 구분을. 우리는 각자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불행을 업신여기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기적인 울타리 속에서 영역밖의 인간을 공존과 상생이 아닌 경쟁과 배척으로 바라본다. 인간이라는 자연적 존엄성은 알량한 민족과 국가라는 인위적 경계에 의해 짓밟힌다.
'식민지 사람은 2개 언어를 해야한다.' 역사학자 프란츠 파농의 말은 우리 세계의 소통이 어떤 부등호로 나아가는지를 궁극적으로 대변한다. 우리가 영어에 매달리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부강함떄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힘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민족과 국가의 열등함을 인식하고 그 안에 속한 이들을 비슷한 잣대로 폄하한다. 그 안에 동등한 인간은 없다. 우리가 소화하는 언어는 그 알력같은 힘의 배분을 꾀한다.
아내를 수술실로 들여보낸 리처드(브래드 피트 역)는 집에 전화를 하며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쏟어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울타리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인간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등돌리고 국가라는 울타리를 세워 그 안에서 안주해야만 한다.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결국 타인에 대한 경계로 깊어간다. 외부의 적이 내부의 결속을 다지듯. 우리는 그렇게 세계의 수많은 인간들과 하나의 세상을 살고 있지만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솟아오른 바벨탑이 무너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의 끝이 희망-물론 절망도 아닌-이 아닌 그 현상 그 자체만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그 떄문이다. 풀리지 않을 신의 저주. 그 매듭이 영원할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계속 비극을 목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대립의 교육을 물려줘야 하는 것이다. 어쨰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아무런 이유없이 섞일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인종의 갈등을 학습시켜야만 하는가. 그건 참으로 슬픈 사실이며 이 세계가 짊어지고 갈 비극의 잉태인 것이다. 그 끝에서 한번쯤은 묻고 싶다. 하느님. 이게 당신의 뜻입니까.
-written by kharisma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