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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것 더 퀸
kharismania 2007-02-01 오전 11:55:41 927   [4]
영국은 여왕(queen)의 나라다. 지난 영국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점쳐보자면 그것은 모두 여왕들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1세기는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였고 1837년부터 1901년까지 국가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대영제국으로써 영국이 세계를 제패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 때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나타난 시대이기도 했고 빅토리아 여왕 때는 찰스 디킨스, 에밀리 브론테, 샬롯 브론테, 워스워즈 등 영국의 문화가 융성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여왕은 영국에 있어서는 황금의 시대를 연 지도자이자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어머니와도 같다.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던 서구의 제국주의가 2차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의 권리를 포기했으나 재미있게도 과거 영국의 식민지들은 해방된 후 과거 영국의 식민지라는 중복 요소를 빌미로 결의를 다진다. 영국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구 영국제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의 연합이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영국의 정부가 아닌 영국의 왕실, 즉 현재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인 셈이다.

 

 사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민주주의가 발달한, 그것도 프랑스와 같은 유혈혁명을 거치지 않고 민주주의를 이룩한 국가에 왕이 존재한다는 것은 꽤나 아이러니한 사실이 될 법도 하다. 하지만 왕실이 없는 영국 역시도 상상할 수가 없다. 정치적으로 권한이 없는 왕권이지만 분명 영국의 왕실은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영화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후 이전, 현 영국 총리인 토니 블레어(마이클 쉰 역)의 총리 당선 과정과 함께 그를 지켜보는 왕실의 여유로운 모습을 묘사한다. 처칠 수상 시절부터 여왕 자리에 앉았음을 은연중에 넌지시 말하는 엘리자베스 2세(헬렌 미렌 역)앞에서 그 당시의 토니 블레어는 새파랄 뿐이다. -물론 현재는 어엿한 3선을 연임한 총리이지만- 그렇게 업무와 일상을 여유롭게 활보하던 왕실에 비보가 날라든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후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가 프랑스에서 파파라치들을 따돌리던 중 차사고가 나 중상을 입었다는 것. 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죽음이 전해지고 이 사실은 왕실을 비롯해 영국과 전세계를 흔든다. 그리고 그 죽음이후 일주일동안 팽팽하게 당겨진 왕실의 위엄과 위기 사이의 고뇌를 세밀하게 카메라에 담아낸다.

 

 영화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이 영국 전체에 가져온 혼란의 정서를 실제 그 당시의 자료화면을 통해 보여준다. 흐느끼는 영국의 군중들, 버킹검 궁 앞에 쌓인 조화더미들. 그 와중에 토니 블레어 총리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추모하며 그녀를 '민중의 왕세자비'로 지칭하지만 왕실은 그에 대한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고 엘리자베스 2세는 두 왕자를 비롯한 가족들을 데리고 발모랄 성으로 칩거하듯 숨어버린다. 그런 그들의 태도에 국민들은 분노하고 비난을 서슴치 않는다.

 

 왕실이라는 구시대적 전유물과 현세를 살아가는 국민들간의 의식에는 분명한 격차가 존재할 것이다. 사실 현대의 왕권이 권력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왕실이라는 존재는 허세뿐인 나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영위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기 보다는 그 영위를 묵인하기에 가능한 영광의 계승이라는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화석의 기념비적인 전시처럼. 물론 그들의 존재는 영국인들에게는 하나의 자부심이자 지키고자 하는 영광의 흔적이다.

 

 영화는 그 격렬했던 일주일을 통해 왕실에 대한 영국인들의 부정적인 견해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급진적인 블레어의 부인 체리 블레어(헬렌 맥크로리 역)는 왕실을 평생 호화롭게 놀고먹는 이들이라 말하며 왕실의 폐지까지 언급하기도 하고 다이애나에 대한 왕실의 묵묵부답에 대해 국민의 일부는 그들의 존립의 근거를 찾기 시작한다. 그에 반해 왕실은 자신들의 위엄을 지키겠다며 버티면서도 갈등과 번민을 시작한다. 급기야 블레어 총리는 여왕을 설득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급박해지는 민심의 정서를 이용해 협박같은 충언(?)을 하기도 한다.

 

 사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영국 왕실의 표면적 위엄을 벗기고 그 근엄한 자태 안에 속해 있는 개개인들을 조명했다는 것이다. 왕비이기 이전에 한 여성이고 지도자이기 이전에 한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어쩌면 그것은 권력이라는 하나의 환상안에 속박된 인물의 내면을 한번쯤 이해하는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10살의 나이에 여왕 자리에 올라 총리에 당선된 토니 블레어까지 10명의 총리를 맞이한 엘리자베스 2세는 어쩌면 여왕이라는 권위덕에 개인을 희생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우리가 접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신성한 위치에 선 자의 위엄에 가려진 개인적 고뇌와 사소한 일상을 들춘다.

 

 무엇보다도 그 작업의 일등공신은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한 헬렌 미렌의 공인데 그녀는 '엘리자베스 1세'에서 여왕 연기를 보였던 전례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여왕의 위엄과 고뇌를 세심하게 연기한다. 새로 취임한 총리앞에서 마치 아들을 훈계하는 어머니처럼 위엄을 드러내지만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홀로 눈물흘리기도 한다. 특히나 중후반부 홀로 큰 뿔이 달린 사슴을 발견하곤 사슴이 사냥당할까봐 도망치라고 다급하게 신호하는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인간적이다. 물론 그 사슴은 마치 왕실에서 달아난 다이애나를 연상시키고 아마도 그로 인해 그녀는 다이애나를 조금 이해했을 것이다. 또한 결국 왕가가 아닌 개인에게 사슴이 사냥당했음을 알게 된 후 그녀가 지닌 상심은 고인이 된 다이애나에 대한 연민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더불어 그 외로운 제왕의 길을 걷게 된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한탄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떄론 그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동경한다. 하지만 사실 그 위치에 선다는 것은 생각보다 행복에 겨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현대에 왕실이란 그만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위치이기도 하다. 과거 왕이란 그 자리에 앉아있기만 해도 되는 신성함 그 자체였지만 지금은 그 위치에 걸맞는 격식을 갖추어야만 인정되는 자리임이 분명하다. 무지하고 비도덕적인 자가 왕위에 앉는다는 것은 분명 과거에서 존재의 근원을 찾게 되는 왕실의 현세적 존재가치를 더없이 떨어뜨리는 꼴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왕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격식과 관습에 갇혀야 하고 그 고고한 자리에 걸맞는 학습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결코 그 자리는 모든 것이 마련된 복권같은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야 하기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자리이며 많은 것을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한것이다. 평범한 이들이 특별한 이들을 동경하듯 특별한 이들이 떄론 평범한 이들을 동경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여왕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통해 이야기한다.

 

 군대에서는 가끔 막내시절이 제일 편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시키는 대로 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막내 시절을 빗대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더불어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고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서 있는 자에 대한 비교적 발언이기도 하다.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을 지닌다는 것은 사실 막중한 부담을 짊어져야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보여지는 왕실은 운좋게 권력을 이어받은 자들의 유유자적한 놀이터가 아닌 하나의 국가를 대변하는 존재이기에 그만큼의 고뇌를 짊어지고 감당해야 하는 나약하고 고독한 집단으로 묘사한다. 사실 그것은 어쩌면 왕가에 대한 동정이자 미화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런 의심이 탐탁치 않은 것은 그 역시도 마땅찮기 때문이다. 평범한 핏줄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성한 공간의 고충을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더불어 영화는 왕실이 존재하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묘사하는데 그것은 왕가를 비난하던 민중들이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감격을 표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마치 그것은 어머니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아이들의 투정이었던 것처럼 그녀가 버킹엄 궁에 등장함과 동시에 그 모든 비난은 경의로 돌변한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영국이 왕실을 여전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일텐데 과거 대영제국의 자존심의 마지막 보루이자 살아있는 증거인 왕실, 그것도 여왕폐하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지극히 영국인이기 때문이고 이는 분명 과거 왕정을 내친 국가들이 지닐법한 일말의 미련에 대한 사례가 될법하다. 현대에서 영국왕실이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 존재한다는 것은 과거에 왕과 국민과의 괴리감을 떠올려보자면 아이러니하면서도 동시에 흐믓한 미소를 자아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버킹엄 궁의 근위대 교대식을 보기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것만으로도 현세에서 왕실이 존재할법한 이해타산적 이유가 될법도 하다.

 

 사실 필자는 이 작품을 보며 만약 우리에게도 여전히 왕이 존재한다면 어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은 부러웠다. 특히나 요즘처럼 인재가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무능한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혜로운 혜안을 지닌 정신적 기둥에 대한 그리움이 강해진다. 분명 영국의 왕실은 그들의 전설같은 과거담을 위한 상징적 배치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 가치가 퇴색되면 극중 말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질지도 모르는 촛불같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분명 왕이 없는 영국은 쉽게 상상할 수가 없다. 더욱이 요즘과 같이 잣대도 없고 중심도 없는 국가 원수의 무책임한 무능력함을 보고 있노라면 '백성은 곧 나를 일컬음이다'라고 했던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인 조지5세같은 성군이 그립다. 우리의 현실에 비하면 영화속 영국은 그들을 스다듬어 줄 자애로운 어머니같은 여왕도 있고 그들을 이끌 지혜로운 지도자인 블레어 총리도 있다. 그건 우리에게는 꽤나 부러운 사실이다. 물론 비슷한 이유로 박정희나 전두환을 그리워한다면 그건 꽤나 통탄할 일이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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