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에서 불륜이 다뤄지는 방식은 딱 두 가지다. 언젠가 제대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몹쓸 행위 또는 로맨틱하고 애절하기 그지없는 사랑이야기. 사실 불륜이라는 행위가 한자 그대로 "인륜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가볍게 얘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인과응보를 강조함으로써 도덕적인 면에 무게를 둔다거나, 이들의 감정 또한 결코 장난스럽지 않은 진지한 감정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감성적인 면에 진하게 호소하는 게 불륜드라마, 혹은 영화의 주된 스타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 <바람 피기 좋은 날>을 얘기하기가 꽤나 조심스럽다. 이 영화는 앞서 얘기한 흔한 불륜드라마, 또는 영화의 두 가지 표현 방식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뿐한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제목처럼,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마음 또한 결코 윤리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무겁지 않다. 때문에 영화가 불륜을 옹호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다행히도 영화는 이런 주인공들의 심리를 불륜이라는 행위의 의미 안에만 가둬놓지는 않았다.
두 명의 주부가 있다. 노래교실을 다니면서 생기를 잃지 않고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슬(김혜수)과 그와는 상대적으로 외부 생활은 잘 하지 않는 편인 새침데기 작은새(윤진서). 둘 다 남편 몰래 누군가와의 만남을 인터넷상으로 지속하다가, 마침내 오프라인에서 대면하게 된다. 이슬의 상대남은 이제 21살인 파릇파릇한 풋내기 대학생(이민기), 그리고 작은새의 상대남은 멀쑥하니 인물 좋은 증권맨 여우두마리(이종혁)이다. 이슬과 대학생 사이는 아직 뭘 모르는 대학생을 이슬이 리드해 나가는 형국이고, 반면 작은새와 여우두마리 사이는 작은새가 수줍은 듯 가릴 거 다 가리면서 은근히 여우두마리 마음을 잔뜩 졸이게 하는 형국이다. 수 차례 모텔을 오가면서 이들은 남편들 몰래 짜릿한 밀회를 즐기고, 공교롭게 같은 모텔을 드나들던 이슬과 작은새를 이 일을 계기로 서로 안면을 익히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결국 이들의 바람은 남편들에게 들통이 나고 마는데, 하지만 그런다고 고분고분 바람을 끝낼 그녀들이 아니었다.
우선 배우들의 연기는 모두가 어깨에 힘을 넣지 않고 제목처럼 산들바람같이 가뿐한 연기를 보여줘서 인상적이었다. <타짜>에 이어서 섹시녀로서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이어가고 있는 김혜수는 그러면서도 "아줌마" 캐릭터에 걸맞게 거기에 나름의 개성을 더해 보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아직 수줍음 많은 대학생을 거뜬히 리드하면서 다룰 줄 아는 부분에서는 카리스마 잔뜩 느껴지는 섹시녀로서의 이미지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면서도, 친구와의 전화에서 이X 저X거리면서 거침없이 대화하고, 미행하는 남편을 두고는 오히려 오냐 배째라는 식으로 덤비는 부분에서는 아줌마와 같은 구수한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치도 버벅거리거나 망설이는 부분 없이, 대사나 행동에 있어서 하나같이 활력이 넘친다. 김혜수라는 배우는 이렇게 매 영화마다 시원시원해서 보는 사람도 속이 확 뚫리게 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 참 좋다.
윤진서의 연기도 칭찬할 만했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청순녀의 이미지를 역시나 어느 정도 이어가고 있는 편인데, 그러면서도 겉으론 안 그런 척 수줍어하며 교묘하게 상대남을 쥐락펴락하는 능청스런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특유의 표정 연기가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져 내숭과 대담함을 오가는 "청순열혈" 유부녀로서의 모습을 잘 드러낸 것 같다. 이슬과 작은새의 상대남들이 되는 대학생 역의 이민기와 여우두마리 역의 이종혁의 연기도 좋았다. 이민기는 수줍고 아는 게 없어서 한편으로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2~30대 여성들이 보기에 충분히 귀여워하며 동생 삼고 싶어할 만한 젊은이의 모습을 무난하게 소화했다. 이종혁은 기존의 신사적이거나 카리스마 있던 이미지에서 벗어나, 여자를 능숙하게 다루면서도 상대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쩔쩔 매기도 하는, 그래서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바람둥이 작업남의 모습을 능청스런 코믹 연기로 재밌게 보여주었다.
앞서 얘기했듯, 이 영화는 불륜이라는 소재에 무겁게 다가가지 않는다. 이들이 밀회를 즐기는 장면은 긴장감이나 애절한 느낌이 생기기는커녕 상호 작용이 자꾸 어긋나는 모습에 시종일관 피식피식 웃음을 유발한다. 모텔이라는 장소에서 은밀한 관계를 가지는 모습 또한 노골적인 노출은 없어도 나올 거 다 나와 가면서 감추지 않고 시원하게 드러내놓는다. (그래서 제작사 측에서 등급심의로 "15세 관람가"를 신청했었다는 얘기와는 달리 생각외로 꽤 낯뜨겁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로 정사를 나누는 과정에서 생기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까지 집어넣는 여유를 보이며, 이들의 바람에 무거운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길 거부한다. 바람 피우는 게 들켜 배우자들에게 쫓기는 장면도 무슨 "사랑과 전쟁"의 한 장면처럼 살벌하고 보기 싫은 게 아니라 여느 코미디물처럼 유쾌한 웃음을 자아낸다.
이는 꽤나 적나라한 대사들에서도 비롯된다. 채팅할 적에 음란채팅을 연상케 하는 여러 용어(?)들을 구사하는 부분이나, 첫만남 부분에서 거시기 얘기가 거침없이 오가며 심지어는 "꺼내보라"는 필살기까지 구사하는 부분을 보면, 이 영화가 불륜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뭔가 진지한 고민을 하려는 영화라기보다는 섹스코미디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바람"이라는 일탈 행위를 대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태도에서도 볼 수 있듯, 이 영화는 그렇게 진지한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고민을 하긴 하는데, 그 고민도 무거운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산들바람처럼 은은하다.
이들의 불륜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이들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본능에 어느 정도 충실하다. 이슬이나 작은새나, "유부녀"나 "주부"라는 호칭 아래 어느 정도의 구속된 환경에서 다소 뻑뻑한 일과를 이어가고 있다. 작은새가 남편에게 휴대전화 좀 사달라니까 남편이 "집전화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 이를 잘 드러내준다. 집전화마저도 선을 길게 해서 바깥으로 들고 나가고 싶을 만큼, 이들에겐 단조롭고 지리한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외부로부터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러던 중에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다. 바깥에서 불어온 산들바람이 급기야 무기력해 있던 심장을 간지럽히면서, 가정 생활에 마냥 충실해 있다가 타인으로부터의 자극으로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원하고 있었을 욕구가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슬은 대학생을 만나면서 예전 대학교 다닐 적의 그 젊음, 그 생기를 다시금 느껴보고 싶어하고, 작은새는 여우두마리와의 만남을 통해 지금은 식어도 한참 식어버린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없는, 정말 서로를 로맨틱하게 배려하고 영화같은 이야기를 이어가는 낭만적인 관계를 다시 한번 꿈꾼다. 이렇게 이 여인들에게 바람이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넘어선 안될 선을 넘어버린 몹쓸 행위도, 그렇다고 운명을 원망하고 싶을 만큼 서로가 간절한 비극적 로맨스도 아닌, 그저 지금 현실에서 결핍되어 있는 무언가를 안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잠시라도 달콤하게 맛볼 수 있는 한바탕 소풍인 것이다.
이들 남녀가 맺는 관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진지하지도 않다. 너무 진지하게 나가면 서로 힘들어질 것이라는 알기라도 하듯,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물러설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모습들이다.(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노래도 "바람아 멈추어다오"가 아니던가) 이것은 이 영화가 일상에서 벗어나 맺고 있는 불륜 관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디선가 휙 불어왔다가 언제든 다시 깃털처럼 휙 하고 날아갈 수 있는 바람처럼 이들의 "바람"도 그렇게 가볍게 그려지는 데 비해서,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마침표를 찍는 지점은 이런 비슷한 욕망과 그 욕망을 둘러싸고 비슷한 절차를 밟는 두 여인 사이의 유대감이다. 한바탕 신명나는 바람 끝에 두 여인은 단순히 같은 모텔에서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자주 만나는 꽤나 엄한 사이가 아니라, 얼마든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탁 트인 사이로 발전해 간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냥 욕하고 꾸짖을 수도 있을 이런 자신들의 일탈 욕구를, 나 뿐만이 아니라 이 사람도 똑같이 갖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에 서로를 유독 친근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꽉 막혀 있는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소풍처럼 확 바람에 몸을 맡기고 싶은 여인들의 심리와, 그런 욕구를 통해서 어느덧 돈독한 유대감을 형성해 가는 여인들의 모습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러면서 불륜이라는 소재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라는 도덕적 잣대에서 벗어나, 그만큼 누구나 좁은 현실을 벗어나 바람처럼 마음껏 싸돌아다니고 싶은 본능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 방법이 진지하거나 살벌한 것도 아니고, 이들이 바람 피우는 모습과 왁자지껄한 추격전처럼 가볍고 코믹하기 때문에 더 그럴 듯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드시 이렇다"가 아니라, 그저 여유롭고 편안하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만, 영화 중간중간에 꽤 강도 있는 장면들이 등장함에도 앞서 얘기했던 그런 시원시원하고 가감없는 모습이 오히려 긴장감을 다소 누그러뜨리는 면이 없지 않아서, 영화는 나름 도발적인 생각을 전달하고 있음에도 보고나서 "무난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람이라는 행위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윤리적 관념에만 사로잡히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일탈에 대한 잠재적인 갈망을 설명하는 데에 가볍게 적용시켰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과정이 어찌됐든, 결국 이런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에 대한 이해로 두 여인은 더욱 서로를 이해하고, 여자의 마음에 대해서 서로 공감하며 굳건한 유대관계를 형성했으니 말이다. 굳이 이렇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 <바람 피기 좋은 날>은 너무 인상쓰지 않은 분위기와 기분 나쁘지 않은 웃음 그리고 한번쯤 고개를 끄덕일 만한 메시지 덕분에, 불륜을 소재로 했음에도 보고 나서 보기 드물게 기분이 찜찜하지 않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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