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라는 단어는 그 근원이 지닌 시원한 이미지와 달리 종종 은밀한 은어적 속성으로 소통되곤 한다. '바람났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다' 등등..불경하지만 한편으로는 낭만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 같기도 한 바람이란 단어의 속성은 사실 사회적 가치관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공해적 교감에 가깝다. 당사자들에게 바람이 지닌 낭만은 타인들에게는 불륜으로 인식되고 법적 테두리로 들어오면 간통이라는 극악한 단어로 명명된다. 결국 그것은 당사자간의 은밀한 쾌감 밖으로 튕겨져나가면 낭만의 뉘앙스로 소통될 수 없는 비속한 한계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바람난 두 여자가 있다. 사실 두 여자는 지극히 평범하다. 한 여자는 길 위에 내팽개쳐진 금붕어를 살리기 위해 집까지 내달린다. 결국 물 위에 금붕어를 안착시키는데 성공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한 여자는 열리지 않는 커피통을 부여잡고 낑낑거린다. 그녀는 그 커피통을 내던지고 세탁기 속의 빨래를 끌어내지만 빨래마저도 엉켜있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 하나의 가정에 예속된다. 여성이 딸로써 가정에 머물러 있는 것과 아내로써 가정에 귀속되는 것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물론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여성이 주부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활동과 결여될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물론 여성의 사회 진출이 급격히 늘어난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 말은 지극히 시대착오적 정서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그 변화의 표면적 흐름에 비해 비율은 그 수위에 오르지 못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실제로 국내 여성 인구가 전체인구의 50.1%에 이르지만 OECD국가 중 여성의 사회진출 비율은 상당히 열악한 쪽에 속한다.-
물론 이런 사례를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성적 평등이 도태되고 있는 사회현실을 꼬집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여성이라는 하나의 성적 인권이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적절히 머물러 있는가에 대한 고찰은 한번쯤 마땅함을 언급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는 영화가 바로 그 지점을 통해 극의 전개에 적절한 근거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람난 두 여자가 손가락질을 피할 수 있는 이해지점은 바로 그 것에 있다.
주부로써의 삶에서 본질적인 자아가 도태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두 여자가 택하는 것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불륜이다. 그것은 명백히 사회적인 지탄을 동반하는 행위지만 우리가 사는 삶의 테두리가 항상 법적인 영역안에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영화는 불륜보다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그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 행위를 마치 낭만에 비유하며 위태로운 논란의 고지에 세우는 것인가라는 의심이 들법도 하다는 것이지만 그 역시도 아니다.
일단 영화는 두 여성이 바람이 나는 행위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어떤 미화나 포장도 없이 단순명료하다. 극 중 바람이 나는 두쌍의 커플들은 각각 본명이 감춰진 채 그들이 만나게 된 채팅창에서의 닉네임으로 소통한다. 이슬(김혜수 역)과 대학생(이민기 역), 작은 새(윤진서 역)와 여우 두마리(이종혁 역).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본명 대신 이 대화명으로 소통하고 교감한다. 그것은 왜? 왜냐하면 그들이 바람을 피는 행위적 시공간이 현실을 벗어난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바람은 하나의 일탈적 욕망과의 부합이고 그 비현실적 공간에서 그녀들은 자신의 본명을 표시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녀들이 자신의 본명을 지니는 공간은 금붕어 두마리에 집착하게 되는 지루한 일상-물론 그녀가 선천적으로 선한 기질도 있겠지만-이나 열리지 않는 커피통 혹은 엉켜 풀리지 않는 빨래더미와 같은 지긋지긋한 일상에서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비현실의 공간이 결코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슬과 대학생은 결국 이슬의 남편(박상면 역)의 계략에 의해 들통나고 작은새는 그 현장을 우연찮게 목격하며 경찰인 남편의 대동까지 보게되고 맘이 편치가 않다. 그것은 일탈의 행위가 책임을 동반해야 됨을 의미한다. 결국 개인의 욕망은 때론 사회적 윤리와 맞닿으며 범법적 이해로 결론지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바람이라는 욕망이 불륜으로 규정되어지는 것 역시 그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영화는 뻣뻣한 규율의 잣대를 깊숙히 들이밀며 그 어긋난 지점을 강제로 맞붙이는 대신 그 일시적 일탈이 누그러지며 서서히 스스로 자신의 근원지점으로 회귀해가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한차례 시련(?)을 겪은 이슬과 대학생의 굴절된 로맨스는 그 시련에도 불구하고 은밀한 밀회를 반복한다. 그러나 시련의 과정이 없던 작은새와 여우의 로맨스는 작은새의 감정의 골이 깊어갈수록 스스로 그 감정에서 떨어져나가는 여우 두마리의 심리를 통해 그 얄팍한 애정관계에 일침을 가하는 형세다.
사실 바람을 주제로 하는 영화는 많다. '해피엔드'는 바람난 욕정 끝의 끔찍한 결말을 배치하며 그 사소한 이기심이 부른 파괴지향적 위태로움을 드러냈고 바람난 가족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대외적으로 안주하고 있는 도태적 현실을 전가족의 바람화로 비틀어버림으로써 가정의 외적 선전성과 개개인의 내면적 욕망이 불일치되는 지점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작품은 바람이라는 소재를 통해 어떤 비범함의 영역에 들어서기 보다는 지극히 사소한 개인적 고백담을 들추고 있다.
결국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이라는 현상에 대한 염탐적 묘사가 아니라 바람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여성의 심리적 변화 혹은 성숙이다. 그녀들이 바람이 난 이유는 무료한 삶의 일탈적 욕구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그로 인해 두 남자를 만나지만 그것이 지속될 수 없는 비속함에 머물것임을 알고 알게된다. 불륜적 일탈로 마련한 비상구가 언제까지나 열리는 문이 아니라는 것. 결국 그녀들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강압적인 규범적 억압도 한몫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 스스로의 꺠달음에 있다.
더불어 이는 두 여성의 교감으로도 함께 완성되는 부분인데 전혀 상관없던 두 여성이 그 야릇한 공감대를 통해 서로의 영역에 교집합을 형성하고 종래에는 서로에게 기대게 되는 것은 단순한 플롯의 형성에서도 그 의미적 결말에서도 적절한 즐거움을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여성의 범법행위는 영화를 통해 짜릿한 일탈로 승화되고 관객 역시 그런 그녀들로부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얻게 된다. 그것은 아무래도 영화를 이끄는 두 여성배우의 연기가 캐릭터를 잘 살렸기 때문인데 특히나 김혜수의 농익은 연기는 영화를 쥐고펴는 힘을 지녔다. 또한 그와 상반된 윤진서의 캐릭터도 그에 못지 않은 매력을 발산한다. 또한 이종혁과 이민기의 캐릭터는 두 여성에 비해 캐릭터의 비중이 떨어지지만 그에 적절하게 상응한다. 그리고 각각의 캐릭터가 설왕설래하며 받아넘기는 대사의 묘미는 노골적이지만 비속하지 않은 묘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다만 영화가 지극히 사적인 사연에 머물러 어떤 영화적인 비범함에 도달하지 못함은 일종의 불만으로 제기될 법도 한데 극에서 등장하는 두 여성이 경제적으로 부족함없는 중산층 혹은 그 이상의 가정의 주부하는 점에서 영화속의 불륜은 사치적 풍조라는 이해구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는 결국 극의 허구를 어느 관점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양상일 법하다.
어쩄든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일상의 틀을 부수고 싶은 순간이 온다. 물론 그것이 바람이라는 은밀한 관계로 발현되면 영화처럼 은연중에 잘 풀려나가는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영화속의 일탈은 보고 즐겨도 그것을 답습할 용기를 지니는 것은 좀 무모할 수도 있는 법이다. 다만 자신의 삶에 특별한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한번쯤 자신과 같은 동병상련의 이웃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비상구가 될법하다. 서로 은밀한 지점에서 조우한 두 여성이 친구가 된 것은 그들이 특별한 곳에서 인연을 겹쳤기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이 그곳에서 만나게 된 까닭이 비슷했기 때문일것이다. 결국은 바람끝에 두여성이 만남을 맞이했다는 것. 그것은 두 여성이 그와함께 맞이한 각각의 이별이 대수롭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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