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사람들. 타인에게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정신적으로 미숙한 상태의 장애를 겪는 이들을 우리는 연민의 시선으로 동정하지만 어쩌면 동정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닐까라는 고민이 문득 엄습해왔다. 이영화를 보면 그렇다. Laundry(세탁소)의 일본표기명을 그대로 빌려온 이 영화의 제목인 란도리(ランドリー)는 더도 덜도 말고 영화의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인물의 그자체를 아무런 꾸밈없이 들이민다. 그것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 그 자체다.
할머니의 코인세탁소에서 세탁물 도둑을 감시하는 테루(쿠보즈카 요스케 역)는 어린시절 맨홀에 빠지는 사고로 머리를 다쳐 머리에 흉터가 생겼고 사람들로부터 뇌에도 상처가 있다고 들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 미숙함은 스무살의 테루가 사회로 발을 내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없다가 아닌!- 편견을 지니게 하기에 충분하다. 관객의 시선안에서 사실 테루는 그저 장애를 겪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판명되겠지만 극중 그의 말처럼 그는 세탁물 도둑질을 막는 중요한 임무를 행하고 있다.
테루가 하루종일 세탁소앞을 지키며 손님들을 감시하는 행위는 일종의 관찰이며 그의 관찰행위는 테루의 시선을 통해 관객에게 전이된다. 재미있는 것은 장애가 없는 일반인들의 모습이다. 테루가 지키는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제각각 특별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 마치 중독과도 같이 사진을 찍어대며 자신의 사진을 평가받고 싶어하는 아주머니, 매일 자신의 속옷 한벌을 세탁하러 오는 노인-테루는 그 이유를 아마 집에서 박대받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과 18전 전패의 3류 복서. 영화속에서 특별해 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사실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않다. 현실에 존재하는 이들이 영화를 통해 특별하게 여겨질 뿐이다. 이는 분명 현실을 살고 있는 정상인의 삶이 과연 정상인가라는 의문을 지니게 한다. 이는 우리의 의식이 지니는 시야에 대한 문제인데 우리 스스로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 이외에 보려하지 않는 것들, 혹은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 것들이 스크린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다. 결국 비정상인인 테루 -일반적인 사람들의 판단안에서- 가 보는 정상인의 모습이 오히려 비정상인에 비해 나을 것이 없어보인다. 우리 역시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미즈에(코유키 역)는 그 경계선의 불명확함에 근거가 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과거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충격으로 도벽에 빠지고 여전히 그 과거의 충격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는 우연히 자신이 흘린 세탁물을 가져다주러 방문한 테루에게 구원적인 신호를 보낸다. 극중 대사처럼 그녀는 테루에게 의지하는 존재다. 미숙하지만 테루는 옳고그름의 구분은 명확하다. 사람들은 그를 배려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러 오는 아주머니나 자신의 계속되는 패배의 아픔을 세탁기안에 들어가 홀로 삭이는 복서는 모두 다 결핍된 삶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군상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누군가를 이겨야만 하는 그들에게 테루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는 미숙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루에게 강한 척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악의를 품을리 없는 상대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다.
미즈에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가슴에 깊이 박힌 과거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그녀에게 테루는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낼 수 있는 가식없는 인간이다. 옷 한벌을 위해 먼길을 찾아온 테루의 선한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연다. 물론 테루가 가지고 온것은 그 옷한벌만은 아니다. 그녀를 향하는 여정에 동행한 샐리(나이토 타카시 역)의 말처럼 우주에서는 몰라도 지구에서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 감정이 그의 마음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이고 그 옷은 그 감정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상징물일 따름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어떤 사념적 고찰이라기 보다는 현상의 관찰 그 자체와도 같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군상으로부터, 테루와 미즈에의 인연이 만들어내는 상황으로부터 우리는 영화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그것이 전부다. 하나의 맥락이 되는 감정이 순백색으로 드러나는 그 마지막 순간을 위한 일종의 기다림과도 같다. 그리고 그안에서 함께 기뻐하거나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특별하지만 모든 것은 우리의 평범한 삶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정상이라고 믿는 우리의 불완전한 세계를 비정상인의 시각과 행위를 통해 주목하게 되는 것뿐이다.
테루는 타인의 말을 쉽게 기억해내지 못하지만 그 말과 행위를 간직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행위로부터 전달되는 의미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숙한 그의 세계는 정상인보다도 많은 것을 발견하고 많은 것을 느낀다. 삶으로부터 얻어지는 순간의 기억안에서 그는 자신의 짧은 세계를 구축하고 생각하려한다. 미숙하지만 순수한 테루의 심성은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배려한다. 이는 분명 정상이면서도 자신의 삶을 학대하며 살아가는 극속 인물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모습이며 이를 지켜보는 관객에게 던져지는 잔잔한 충격이다. 테루가 미즈에에게 말하는 '휘파람부는 사내'의 이야기는 테루가 서있는 지점을 상기시키게 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을 기억해내지 못하던 테루가 이야기의 마지막을 꿈속에서 보게 되는 순간 분명 테루는 자신이 봐야하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은 테루가 세탁소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한발 딛기 시작했을 때부터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예감된 내일의 청사진이자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을테다. 영화의 결말은 그런 과정을 거쳐나간 테루가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하나의 의지적 감성이자 희망의 표출이다.
테루와 미즈에와는 별도로 샐리는 주목할만한 인물이다. 그는 등장만큼이나 독특한 캐릭터인데 묘한 지점에서 웃음을 생성시킴과 동시에 테루와 미즈에의 관계에 하나의 계기를 형성하는 전환점이 되는 인물이다. 특히나 그가 보여주는 히치하이킹의 묘미는 상당히 박력있는 웃음을 선사한다.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순백색으로 세탁하는 것만 같다. 이 영화의 순백색 감성안에서 관객의 마음은 순수하게 표백될 것만 같다. 마치 찌들어버린 삶안에서 위안을 얻고자하는 극속 인물들이 테루의 곁을 맴도는 것처럼 이 영화는 그들과 다를바없는 관객에게 위안을 준다. 말 그대로 이영화는 우리의 감성을 표백하는 란도리(세탁소) 그 자체다. 가식도 없고 허세도 없는 진실된 위안에 의지하고만 싶어지는 정결한 감성이 영화로부터 세제향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것만 같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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