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곧 국가다(Lètat, c'est moi).'
왕권신수설을 주창했던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고 불릴만큼 강력한 왕권의 전제 군주였다. 파리의 호사스러운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의 강력한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베르사이유 궁전근처에는 국왕에게 아첨하기 위해 모여든 귀족이 7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빛과도 같은 권력을 쬐는 1%의 귀족과 성직자 뒤에 드리는 그림자는 99%의 시민몫이었다. 가난속에서 납세의 압력에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민들은 귀족들과 왕실의 호사스러운 사치의 비용을 죄다 부담해야만했다. 결국 불만이 폭발한 시민들이 양손에 무기를 들고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전진했던 것이 프랑스 시민혁명이었고 그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치 팜므 파탈과도 같은 이미지로 기억되는 것만 같다. 마치 당의 현종을 유혹하여 국사를 망치게 한 양귀비처럼.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남편인 루이 16세에게는 양처와도 같은 아내였다. 다만 자기안위적 사치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이 배고픈 시민들을 자극하여 왕가의 몰락에 부채질을 했다는 사실안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양귀비와 동일한 비교선상위에 등장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빵이 없어서 시민들이 굶주린다는 말에 '그럼 케잌을 먹으라고 하지(Let them eat custard).'라고 대답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이야기는 진실여부를 떠나 민중들에게 그녀가 얼마나 증오의 대상으로써 입에 올려지고 있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실례일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에서는 근거없는 소문이라는 뉘앙스를 취하지만-
폭풍과도 같았던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안에서 발췌되는 이름인 마리 앙투아네트.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그녀라는 아이콘 자체를 스크린에 새겨넣은 작품이다. 그리고 영화는 지극히 노골적으로 시대적 배경은 무시한 채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개인적 인물을 파고든다.
침대에 누워 단잠에서 깨어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커스틴 던스트 역)의 모습으로 영화도 기지개를 편다. 그녀는 이제 프랑스 왕가의 며느리로 가게 될 운명이다. 강아지와 함께 종종 걸음을 뛰는 생기발랄한 그녀에게 그 운명은 왠지 버거워보이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미래를 위해 볼모처럼 프랑스 왕비의 인생을 부여받은 그녀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설레는 15세 철부지 소녀같기만 하다.
15세 소녀의 철부지같은 모습을 묘사하는 영화의 의도는 다분하다. 어린 나이로 프랑스 왕비로써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녀의 인생은 꽤나 극적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녀의 운명적 결말덕분일지라도- 그 극적인 인생을 느끼게 해주는 건 그녀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시대와 환경때문이다. 대혁명의 촉진제로써 혹은 그 대혁명속의 비극적 인물로써 그녀의 삶은 꽤나 강렬하다. 다이아몬드처럼 화려한 왕비로써의 삶이 단두대의 이슬로 마침표를 찍어내리는 인생의 굴곡이란 세월을 넘어 회자될만한 가쉽거리인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역사서안에 자리잡은 그녀의 이미지를 끌어내지 않는다. 영화는 중간중간 그 시대상황을 내밀긴 하지만 무게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화려한 문양으로 둘러진 벽지보다도 주목받지 못하는 역사성은 시대를 대변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상징성보다는 그녀의 사담적인 개인성을 택한 영화의 화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아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는 그녀 자신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시대에 얽힌 혹은 시대에 갇힌 이미지의 허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물론 그 허상을 걷어내는 작업은 신중해야 한다. 시대라는 배경을 무시하지 않되 최대한 개인이라는 구도를 잘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시대배경을 아웃포커싱하듯 마리 앙투아네트에 포커스를 맞춘 이 영화는 지극히 그녀의 개인사안에 구도를 가둔다.
무엇보다도 이목을 끄는것은 바로크와 로코코양식의 고전적인 우아함으로 가득 찬 바르세이유 궁전과 의상 등의 배경이다. 화려한 머리장식과 깊게 파여 가슴의 곡선이 강조된 넥라인아래로 코르셋(corset)에 의해 개미처럼 꽉 조여진 허리로 시선이 떨어지면 빠니에(panier)로 한껏 과장되듯 부풀려진 스커트 라인으로 바닥에 닿는다. 화려하고 섬세한 의복 자체만으로도 호사스러운 품위를 지키고자 했던 귀족들의 삶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이 영화의 시선이 머무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경모습으로부터 보여지는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의 바로크적 웅장함과 그이후에 덧붙여진 로코코적인 섬세함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시각적 흥미로움이다.
시각적인 흥미로움이 에피타이져라면 이 영화의 메인디쉬는 바로 그 호사스러운 생활안에 서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정생활이다. 그녀가 오스트리아 공주로써의 흔적을 프랑스 왕비로써의 모습으로 갈아입는 순간부터 조명되는 그녀의 삶에 대한 관찰이 시작된다. 중요한 건 단순히 외관적인 시야확보가 아닌 내면적인 심리대변이라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감싸고 있는 화려한 드레스의 허영성의 외벽을 허무는 것이 소피아 코폴라의 노골적인 의도였음은 영화를 통해 드러난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편애로 여겨질 수 있는 약점을 안게 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하나로 일관된 시선에 변형을 꾀하는 일탈적 발상이기 때문이다. 마치 역사적 가쉽거리처럼 입에 오르내리는 개인에 대한 진지한 관찰이 감독의 의도였을 것이다.
이영화는 화려한 장식과 호사스러운 생활로 치장한 그녀의 왕비라는 타이틀 이면에 잠식된 개인적 방황과 자유로운 삶의 기질을 파고든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의 외적인 권력만을 탐식하거나 외관적인 면모만을 눈요기하듯 훑어본 타인들의 관음과는 다른 시선이며 영화를 통해 얻어지는 색다른 구도적 변환이다. 시대라는 미장센을 덧씌워 설명되던 한 인물에게 짐과 같은 미장센을 최대한 배제하고 인물 그 자체만에 집중한 구도는 독특한 미각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하나의 우려적 표상이다. 과연 그것이 정당한 일인가하는 의문이 틈새를 파고든다. 과연 그녀에게서 시대적 정당성의 물음을 제외시키는 것이 그녀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과 같은 왜곡적 평가로 도출되지 않겠는가라는 의구심이 발생한다. 이는 지극히 시대와 역사라는 기준점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필요악과 같은 논리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짊어져야하는 당연한 논란이다.
중요한 건 영화가 의도하는 방향의 목적성이다. 그것이 궤변적인 변명으로 여겨질지라도 그 의도가 응시하는 방향의 뚜렷함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시대와의 연관성을 떠나서 하나의 여성으로써 혹은 한 인간으로써의 개인을 조명하고 싶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 -소피아 코폴라가 여성이라는 점에서도 이는 근거가 된다.-
물론 이영화가 시대라는 배경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은연중에 노출되는 시대상들이 그렇다. 그들의 사치와 허영에 의해 탕진되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것과 국가적 위상을 위해 재정적 어려움에 불구하고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는 모습에서 시대착오적인 권력의 탐식이 드러난다. -루이 14세시절에 비해 고조된 시민의 불만에 비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루이 16세의 우둔함은 왕권의 점진적 몰락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읽지못했고 그로인해 파생될 혁명의 기운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그 모든 환경을 떠나 순수하게 그녀 자체만을 바라봐주어야 할 외도하나쯤은 존재하는 것도 어쩌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 비록 지탄을 받을지 몰라도 단한번의 변명의 기회를 주는 것이 용납되지 못할 일은 아닐테다.
특히나 최후반부에서 엔딩까지 드러나는 은연중의 긴장감은 이 영화가 취하는 이면적 화법이다. 왕가의 화려한 권력을 대변하던 베르사이유가 성난군중으로 둘러싸이는 상황에 궁에 남은건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뿐이다. 그들곁에 매일같이 찾아와 아첨하던 귀족과 관료들은 죄다 도망하고 결국 그들의 허망한 권력은 무성하게 나자빠진다. 특히나 엔딩씬에 등장하는 망가져버린 그들의 방은 권력의 무상함을 허탈하게 드러내고 그 화려하던 부귀영화의 삶마저 백일몽이었던 것만 같게 한다. 권력의 밑천이 떨어진 그들에게 남은 고독의 정서가 쓸쓸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어쩌면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에게 주는 변명같은 이야기다. 물론 그녀에게 시대의 희생자라는 면죄부를 부여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시대안에서 그녀가 스스로 택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같은 것에 대한 일말의 너그러움정도는 지녀도 될 것만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 영화의 태도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녀의 권력과 위치만을 좇고 그에 환호하는 인간들의 치졸한 군상과 그 안에서 내면적 고독을 곱씹으며 그에 반대로 호사스러운 치장을 즐기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에 대한 시선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감수해야 할 골고타의 언덕이자 더불어 누려야 할 십자가의 영광이 아닐까. 단순히 시대라는 배경에 주목하지 않았다해서 이 영화를 마녀사냥할 이유는 없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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