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의 빛깔을 담은 무지개는 어느 날 문득 떠오른다. 예감도 할 수 없고 징조도 없다. 물론 비가 갠뒤 화창한 햇살과 함께 떠오를 가능성이 많다. 이는 어쩌면 사랑과도 비슷하다. 우리는 사랑을 예감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건 어느 한순간 갑작스럽게 마음속에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수많은 감정을 품게한다. 마치 일곱빛깔 무지개처럼 가슴뛰는 설레임에서부터 가슴저미는 서글픔까지 다양한 감정을 품게한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사랑이라는 단어안에 묶여있다. 마치 일곱빛깔의 무지개가 하나의 선을 이루듯.
수평으로 떠오른 무지개. 수평환 아크라고 하는 수평선의 무지개를 바라보는 토모야(이치하라 하야토 역)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누군가에게 메세지를 전송한다. 농담처럼 던지는 불길함의 안부. 그 안부는 현실이 된다. 추락한 비행기. 그안에 타고 있던 아오이(우에노 쥬리 역). 그녀의 죽음. 그녀의 죽음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그와 그녀의 사정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렇게 영화는 그 인연의 출발지점에 선다.
사실 수많은 일본멜로의 감성이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절절하게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내거는 이와이 슌지의 네임밸류에서 느껴지는 기대감은 가슴을 치밀듯 넘쳐내는 감성이 아닌 가슴에 잔존하듯 침전하는 감성이다. -물론 이 영화의 감독은 이와이 슌지가 아니나 시나리오 작업등 영화의 전반적인 제작에 그의 입김이 묻어있음이 영화자체를 통해 드러난다.- 이 영화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이라는 지독하게 닳고닳은 소재를 통해 드러나는 감성은 언제나 그렇듯 슬픔 혹은 기쁨이다. 사랑이란 게 언제나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가 미친듯이 그립거나 누군가가 미친듯이 보고싶은게 사랑의 본질이다. 그것이 비록 결실을 맺고 안 맺고의 영역적 문제가 아닌 그 감정자체의 발현이 사랑이라는 것의 존재적 의미가 된다. 이 영화는 그 사랑이라는 감정에 담겨진 풀어낼 수 없는 의미적 감성을 애잔하게 풀어낸다.
누군가의 고백을 받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고백을 해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그 감정이 움직이는 순간의 떨림을 간직할 것이다. 물론 그 순간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할지라도 분명 그 순간 전달되는 감정의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만은 없다. 그래서 고백은 쉽지않다. 마음이 절실해도 그것이 표현되지 않음에 매듭지을 수 없는 짝사랑은 그래서 힘들고 가슴아프다.
이 영화가 가슴을 저미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감정의 방향은 명확하지만 감정이 뻗어나가기에는 망설임이 크다. 너무나도 가까이 있기에 단 한번의 고백뒤에 남겨질 여운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언제나 가까이에서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 웃음너머에 부끄럽게 숨어있는 사랑의 기운은 좀처럼 고개를 내밀수가 없다. 아오이의 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이 문득문득 고개를 내밀지만 결국 언제나 고개를 숙이는 것.
사랑은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데서 찾으라는 근원모를 구절은 이 영화를 통해 얻어질법한 진리마냥 들린다. 무엇보다도 관객의 눈에 보이지만 극중 두 남녀가 공유하기엔 먼감정처럼 여겨지는 사랑이 그들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음이라는 사실이 이 영화로부터 추려지는 안타까움의 감정이다. 극중 토모야는 여자는 도저히 모르겠다면서 남자볼 줄 모르는 여자들의 마음을 탓하지만 실상 자신의 사랑이 겉도는 것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이 자신의 곁에 있음을 알아채지 못하는 스스로의 둔감함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결국 그것을 꺠닫게 되는 그 순간에 이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꺠닫게 된다는 것. 이미 날아가버린 나비처럼 곁에 둘 수 없는 사랑의 뒤늦은 발견은 애석함을 머금게 한다.
이 영화는 총 8장의 간격을 두며 감정이 익어가는 과정을 마치 계절의 흐름처럼 한번의 역순뒤에 서사적으로 늘어놓는다. 처음 제1장 수평무지개에서부터 제8장 무지개여신까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7장 지구최후의 날은 이 영화의 모든것을 집약해놓은 액자와도 같다. 극 중 아오이가 만든 영화인 '지구최후의 날'은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남은 7일동안의 연인을 보여준다. 짧은 단편영화에 담긴 연인의 애틋함의 정서는 마치 이 영화의 정서와 맞닿는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아오이의 모습은 마치 비현실에서도 현실에서도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으로 도출되는 슬픔의 정서를 덧칠해낸다.
수채화처럼 얇고 투명한 색채감위로 펼쳐내는 아기자기하지만 깊게 퍼져나가는 감성은 이와이 슌지의 트렌드다. 이 영화는 그 트렌드를 최대한 살리지만 진부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박자를 놓친 감정이 보여주는 아련한 슬픔이 영화로부터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수평환 아크가 두 남녀를 관통하는 그림자는 이미 아오이와 토모야의 마음이 연결되었음을 암시하지만 그 작은 암시들이 하나의 확실한 징표가 되어주지 못하고 그네들 사이에 사랑이라는 확신보다는 우정이라는 오해의 벽을 쌓는다. 결국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그네들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우정으로 오해되는 진실된 감정, 즉 사랑때문이었음을 토모야는 뒤늦게 깨닫는다. 그리고 그 뒤늦은 깨달음은 결국 그를, 그리고 그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을 슬픔의 여운으로 인도한다.
돌림노래처럼 뒤늦게 좇아가는 사랑의 안타까움. 결국 감정을 좇아가지만 그 감정의 끝에 남는건 메아리같은 흔적뿐이다. 돌아오지 못하는 레테의 강 너머로 흘러가버린 추억담같은 사랑의 흔적이 남기는 건 뒤늦은 발견덕에 샘솟는 비통한 슬픔뿐. 하지만 그 슬픔은 결코 눈물만을 남기지 않는다. 세월을 따라 죽어가는 기억너머로 익어가는 추억속에 사랑이 있었다는 것. 그 사랑이 결코 그 시절안에서 노골적이진 못했어도 묵어간 세월안에서 농익어 갈 것이라는 것. 배터리가 나간 아오이의 핸드폰이 결코 다시 켜지진 않을지라도 그 핸드폰안에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토모야는 위안처럼 간직한 채 살아갈 것이다. 자신이 바라본 무지개가 문득 떠올려준 그리움처럼 그녀는 그렇게 토모야의 세월안에서 애틋한 각인을 남긴채 희미해져 갈 것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이루어져야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니까. 마치 잠시 떠오르는 무지개가 사라져도 그 아름다운 빛깔의 감상마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단 한순간도 연인의 정점에 서지도 서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두 남녀의 사랑이 이토록 애틋한건 말그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안타까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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