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일본은 참 멜로 영화 하나는 제대로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코미디는 개인적으로 내 취향이긴 하나 사람에 따라 취향이 갈릴 수 있고, 일본 호러의 경우는 최근 그 약발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일본 멜로 영화가 우리 감성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여전히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대성공을 거둔 이후, 일본 멜로 영화는 때론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때론 독창적인 이야기 속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통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특유의 테크닉을 유감업이 발휘해 왔다.
이런 일본 멜로 영화의 재능은 따끈따끈한 신작 <무지개 여신>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사실 보기 전에 줄거리를 보고는 <러브 레터>와 상당히 흡사하다는 걸 느꼈지만, 보고 난 뒤 가슴 속에 남는 감성적인 파장은 <러브 레터> 때와는 또 다른 무엇이었다. 어디서 본 듯한 줄거리로 새로운 울림을 변주해내는 능력, 이것이 일본 멜로 영화의 테크닉인 것이다. 뭐 테크닉이랄 것도 없다. 이런 건 그저 가슴으로 보고 느껴야지.
소규모 영상 제작사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일하고 있던 청년 기시다 토모야(이치하라 하야토)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든다. 한때 이 회사에서 일했었고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사토 아오이(우에노 주리)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것. 토모야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아오이의 집을 찾아가고 영화는 이때부터 그들이 처음 만나기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토모야는 아오이와 같은 레코드샵에서 일하고 있던 동료를 스토커마냥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상황. 토모야는 그녀에게 다가갈 목적으로 아오이를 만나고, 영화 만들기에 열심인 아오이는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토모야의 사랑 전도사가 되어주기로 한다. 그러나 토모야는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그러다 얼떨결에 아오이의 영화 동아리 일에 끼어들게 된다. 이후 토모야와 아오이는 서로 고민을 털어놓고, 아오이의 동생 카나(아오이 유우)와 축제에도 함께 가는 등 미운정 고운정이 쌓인 친구 사이가 된다. 그러다 둘은 대학을 졸업하고, 먼저 취직한 아오이의 권유로 토모야는 아오이가 있던 영상 제작사에 취직하게 된다. 그러던 중 아오이는 보다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미국으로 떠날 결심을 하고 토모야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만, 토모야는 은근히 망설이는 티를 보이는 아오이를 말리지도 않고 미지근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아오이는 미국으로 떠나는데...
일단 배우들과 그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애착이 간다. 이치하라 아야토는 꽃미남 배우면서도 털털하고 덜렁대며 실수 많이 하는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며 현실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우에노 주리 또한 중성적인 매력이 한껏 부각된, 하지만 그 속에 여린 감정을 안고 있어 더 마음이 가는 캐릭터를 사랑스럽게 소화해냈다. 조연급이라 할 수 있는 아오이 유우 역시 특유의 청순함과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보여주며 극의 화사한 분위기를 더했다. 하나같이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이 나왔음에도(특히 우에노 주리같은 경우는 <스윙걸즈>에서 봐놓고 왜 이제 와서 이 배우가 이렇게도 아리따운 배우라는 걸 알았는지;;) 그들의 연기에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캐릭터 역시 그만큼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리라.
이들이 펼쳐가는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의 악영향에 힘입어 생겨난 수많은 완벽남 완벽녀들의 별세계같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선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동화같은 배경이나 대사로만 일관하며 위화감 잔뜩 조성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꿈을 향해 부딪치고,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를 밍숭맹숭한 감정으로 갈등을 겪기도 하고, 때론 서로 격하게 치고박고 싸우기도 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나온 몇몇 비현실성으로 가득찬 하이틴 멜로영화들보다 훨씬 현실감 있고 정겹게 다가왔다. 일본 영화 특유의 세밀한 감성의 특성상 제목에서부터 섬세한 감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감성이 단순히 말초적 신경만 자극하는 뜬구름이 아닌, 수긍할 만한 현실적인 상황에 기반을 둔 감성이기에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대표작인 <러브 레터>와 내용이 꽤나 흡사하다. 홍보 과정에서도 마치 이와이 슈운지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양 그의 두번째 러브 레터라고 홍보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만의 독특한 멜로 감성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뻔한 설정일 수도 있을 하이틴 멜로의 틀 속에 애틋한 비밀을 숨겨놓음으로써 그 비밀이 터졌을 때 솟아나오는 가슴 아린 감정을 더 극대화시킬 줄 안다고나 할까, 그런 감성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영화는 마냥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부드럽게 사랑을 속삭이는 데서 벗어나, 좀 더 현실성 있는 접근을 시도하는 듯하다. 물론, 아름답고 감각적인 영상도 빠지지 않는다. 햇빛을 가득 머금은 듯 푸근하게 느껴지는 색감이나 디지털 카메라로 그대로 찍은 듯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영상들이 이를 증명한다. 특히나 토모야와 아오이 발밑에 퍼진 물에 비친 수평 무지개의 정경은 미니홈피 메인 화면같은 것으로 정말 잘 어울리겠다 싶을 만큼 서정적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잠시 삼천포로 빠졌는데, 암튼 이 영화 속에는 뽀송뽀송하고 여린 느낌이 묻어나는 주인공들의 애틋한 감정과 함께 그런 감정들이 펼쳐지는 배경이 꽤나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토모야와 아오이가 졸업 후 취직한 영상 제작사에서의 생활은 고달프다. 토모야는 예의 덜렁대고 조심성없는 성격 때문에 늘 구박받기 일쑤고 심지어는 발길질까지 당한다. 이들은 취재를 위해 스피드 데이트 모임과 같은 은밀한 장소까지 잠입하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나 가슴앓이를 하기도 한다. 토모야는 이 모임에서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나이를 제대로 속였다는 사실에 기겁하기도 한다. 이렇게 단지 동화적인 분위기에서 그들만의 사랑으로 그려지는 게 아니라, 만만치 않은 세상과 그 속에서 사랑이란 것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이 배경삼아 보여지면서 이들의 애틋한 감정이 뜬금없기보다 더 아련한 추억처럼 와닿는 것이다.
<러브 레터>는 지금만큼 널리 알려지기 전까지 결말에 일종의 "반전"이 있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이 영화의 경우는 사실 반전이랄 것도 없다. 이미 <러브 레터>의 감성을 경험한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첫부분에서 아오이의 사망 소식이 들리고 토모야가 아오이의 집을 방문하는 순간 우리는 어느 정도 이들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지 눈치를 채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어쩌면 앞이뻔히 보이는 이야기의 결말이라 할지라도 후에 등장하는 이들의 세밀한 감정의 떨림과 애틋한 추억들, 그 추억들 뒤로 펼쳐지는 여러 사람들과의 감정의 양상들을 지나오면서 결말의 감동이 주는 파괴력은 여전히 그 힘을 충분히 발휘하게 된다. 이렇게 그저 담아두기만 하기엔 너무 아까운 감정들을 발견하기까지, 그들은 감정의 변화 앞에서도 무뎠고(혹은 무딘 척했고) 너무 어리석었기 때문일까. 뒤늦은 비밀의 등장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영화 속 여러 인물들은 유난히 숨기는 것이 많다. 아오이가 사망한 뒤 아오이의 가족들은 아오이의 유골을 맞이하러 미국에 가지만 그 가는 길이 이상하리만치 즐겁다.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추억을 회상하며 함박웃음을 짓기까지 한다. 아마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기엔 가족을 잃은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리라. 토모야와 잠시 연인 관계가 되는 여인 치즈루 또한 그렇다.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이혼한 경험도 있다는 것까지 속인다. 그리고는 진실이 밝혀진 뒤에 묻는다. "내가 34살의 이혼녀라는 걸 알고도 넌 날 사랑했을까?" 사랑을 이어가기에 껴안고 있는 진실은 너무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이건 토모야와 아오이의 감정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끝까지 서로에게 관심 있다, 좋아한다는 고백도 한번 못한 채 그렇게 헤어졌다. 토모야는 아오이에게 사귀자는 말조차도 농담처럼 툭툭 내뱉었고, 정말 토모야를 좋아했던 아오이는 그래서 상처를 받기도 했다. 떠나는 게 싫었던 아오이는 토모야에게 은근히 내색을 하는 듯도 보였지만 직접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은 적은 없다. 얼굴을 맞대고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기에 진실로 품고 있던 그 감정들은 너무나 크고 깊어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참 어리석은 듯하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확실히 믿지 못하고, 감당도 못할 것 같아 끊임없이 숨기기만 하니 말이다. 진실로 드러내기엔 때론 애틋한 사랑의 감정의 폭이 너무 넓어서 품 안에 다 담기가 힘든 것일까. 늘 조금은 위장하고, 조금은 속이고, 조금은 줄여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언젠가 알아줄 거라고 속앓이를 하지. 하지만 눈치 10단이 아닌 이상 상대방은 또 그걸 어떻게 알까. 그저 애꿎은 기대만 하다가 멀어져갈 가능성이 더욱 높은데 말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늘 자기 감정을 조금씩 위장하고, 속이고, 줄이며 서로에게 다가가는, 소극적이어서 때론 더 아픈 결과를 낳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서 헤아려주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알아채는 것도 두려워서 몸을 사리고 마음을 감추기까지 하는 사랑의 모습이, 가슴아프고 어리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습관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토모야와 아오이가 만드는 영화 <지구 최후의 날>처럼, 지구가 멸망하거나 내일 당장 죽기라도 해야 상대방에게 진심을 털어놓을 것처럼, 그만큼 사랑에 서툰 사람은 자기 마음을 숨기고 싶은 보물 혹은 약점인 양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이들이 맞이하는 사랑의 결과가 행복하지만은 않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 겪어봤을 자기 감정에 대한 실수이기에 우리는 안타까움과 눈물을 보이면서도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토모야와 아오이를 향해 카나가 참 바보라고 얘기하듯, 아직 사랑의 감정이란 게 어떤 것인지, 지금의 감정이 드러내도 괜찮은 것인지 아님 드러내기엔 하찮은 것인지 판단하기도 서툰 젊음의 시기에 겪게 되는 이런 사랑의 실수는 참 바보같으면서도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한 실수다.
이렇게 영화 <무지개 여신>은 뻔한 영화적 스토리일지라도 지금 토모야와 아오이가 지나고 있는 시기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어리석은 습관을 이야기함으로써 푸근한 감동을 자아낸다. 단지 영화 속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나도 저럴지 몰라 하고 한번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끌벅적한 대학교 생활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의 떨림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어쩌면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이 순간도 지구 최후의 날이라도 와야 마음을 드러낼 것처럼 꽁꽁 숨겨놓는 서툰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지개도 결국 비온 뒤에 비로소 일곱빛깔을 드러내며 빼꼼이 우리를 향해 내다보는데, 그런 무지개처럼 지금 이 시기, 자기도 쉽게 측정할 수 없이 번져나가는 사랑의 감정이란 그렇게 좀처럼 금방 드러내지 못한 채 복잡한 색깔을 품고 있는 감정일까.
한마디 더 :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주제가를 꼭 다 듣고 가시라. 너무나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