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해 제작된 '여섯개의 시선'이 처음 극장에 내걸렸을 때만 해도 일회성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2006년 1월 인권위원회의 기획으로 '다섯개의 시선'이 극장에 내걸렸을 때는 이 프로젝트가 계속될 것만 같은 기대감을 품게 했다. 그리고 그 두번째 프로젝트 이후 10여개월이 지난 지금 그 세번째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그것도 이제 노골적으로 프로젝트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듯 '세번째 시선'으로 개명까지 한채로.
이미 앞서 이뤄진 두 개의 프로젝트를 목격했다면 이 영화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측면과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쯤은 간파했을 것이다. 양지보다는 음지를, 풍요보다는 빈곤을, 그리고 주목보다는 소외를 의식하는 시선들의 모임. 그것이 이 프로젝트의 시야가 추구하는 방점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재능있는 감독들-단지 재능있음이 아닌 소위 말하는 잘나간다는 감독부터 인정받은 감독들-의 단편영화를 엮은 옴니버스 영화라는 것이다. 짧지만 굵직하고 간결하지만 총명하다. 솔직히 소비지향적인 형태로 극장을 넘나드는 관객에게 이 영화는 자신들이 취하는 소재만큼이나 외면당하기 쉽지만 만약 이 프로젝트를 꾸준히 지켜본 관객이라면 이번 프로젝트 역시 서슴치 않고 입장료를 지불할 준비는 되었을 듯 싶다.
일단 이번 작품은 6편의 단편들이 모여 106분의 런닝타임을 여섯조각으로 채운다.
<잠수왕 무하마드> - 정윤철 감독
극 중 대사처럼 배부른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3D업종의 종사는 관심밖의 일이다. 부족한 노동력의 구멍을 메우는 건 동남아를 비롯한 후진국가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바다를 건너 대한민국으로 잠입한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무하마드는 자신이 살던 고향땅을 등지고 한국으로 건너와 유독성 가스공장에서 노동한다. 환기도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속에서 일하다가 단속이 뜨면 잽싸게 도망가야한다. 길거리에게 꼬마들의 공을 뻇어 놀다가도 경찰의 모습만 보이면 부리나케 달아난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이기 이전에 불법 체류자니까.
그런 그는 수족관을 응시한다. 무언가 아득한 그리움의 눈빛을 담아서 그는 수족관 속 바다를 꿈꾼다. 목욕탕의 온탕안에서 얼굴까지 물에 담그면서도 그는 바다를 꿈꾼다. 자신이 살던 고향에서 하루종일 잠수를 했던 잠수왕은 먼 이국땅의 목욕탕에서 고향의 향수와 회포한다.
무하마드의 현실은 이땅의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아기자기하게 풀어낸다. 피부색이 까맣다는 이유만으로 깜씨라고 조롱당하고 이땅의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고된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불법체류자로써의 도피적 현실에 직면한다. 물론 영화는 그런 환경적 요인보다는 개인의 정서에 집중한다.
잠수왕이라는 맥거핀은 무하마드의 개인적 존재를 희화화하며 동시에 외국인 노동자의 불합당한 처우가 암암리에 묵인되는 이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작품은 '여섯개의 시선'에서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와 '다섯개의 시선'에서 김동원 감독이 연출한 '종로, 겨울'의 계보를 잇는다. 하지만 앞의 두 작품에 비해 비극적인 감도는 거세되고 그저 일상적인 담담함만이 발견된다. 물론 상황의 심각성을 간과하는 것이라는 불만을 표출할지는 모르지만 이 작품의 의도는 사회적인 모순을 주시한다기 보다는 지극히 개개인적인 소양에 가까운 의식수준을 살피고 있는 듯 하다. 사회제도의 모순이 부른 비극담은 충분히 인지했으나 우리 개개인들의 의식은 과연 개선되고 있는가의 문제. 그것이 우리 사회가 짊어진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실태에 더욱 생생하게 커밍아웃할 수 있는 솔직함이 아닐까.
심각성의 인지를 느끼기에는 식상할 법도 한 소재안에서 감성적인 모티브를 끌어내고자 했음인지는 모르지만 무난한 출발이자 관객에게 적당히 여유로운 화법의 포석이라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영화의 서두에 마땅한 작품인 듯 하다.
<소녀가 사라졌다.> - 김현필 감독
불쌍한 사람. 저 사람은 불쌍하다라는 감정이 느껴질 때 우리의 눈빛은 다들 비슷한 시선값을 책정한다. 동정은 어쩌면 멸시의 보호색인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열등한 위치라는 것에 대한 모종의 인정. 그럼으로써 다가서는 우월감의 예의. 물론 자신보다 열악한 상황에 처한 상대에게 동정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기본 소양일지 모르지만 자신의 동정심을 진심인양 위장하는 행위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누구나 착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베푸는 행위를 선하다고 믿는다. 자신보다 힘든 사람을 돕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행하며 자신보다 열등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하는 가해자로써의 쾌감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움이 아닌 동냥의 심정. 못 가진 자의 비굴함을 통해 얻어지는 가진 자의 성취감.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베푼다는 행위의 선전은 명예로 고취되고 타인에게 내세울만한 미덕으로 승화된다.
그래서 교회마다 어린양들을 위한 김치박스가 쌓이고 그들은 김치 박스를 얻기위해 베풀어준 자를 위한 기도를 올려야한다.
이 작품은 받는 자와 주는 자 사이의 감정적 맥락을 짚어낸다. 소녀 가장이지만 씩씩하고 발랄한 선희를 눈물짓게 하는건 전기가 끊긴 집의 사정도 아니고 자신의 꿈을 비웃는 선생님도 아니다. 자신을 편견없이 대한다는 이의 속마음과의 대면은 선희의 눈물을 내보이게 한다.
소녀 가장이라는 상황적 현실을 드러내고 있지만 실상 이 작품이 내보이는 것은 그 부분적인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차별이라는 상황 그 자체로부터 주어지는 모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상황은 지리산에서 고사한 반달곰 이야기와 오버랩되며 그 목적을 여실히 드러낸다.
반달곰에게 자유를 주겠다며 반달곰을 자유롭게 풀어놓지만 반달곰은 인간이 놓은 올무덫에 걸려 죽는다. 마치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발을 통해 자연의 안식을 방해하고 반달곰의 터전을 망가뜨린 뒤 마치 인심쓰듯 자유를 주겠다는 행위는 소녀 가장의 현실과 맞물린다. 꿈을 비웃는 선생이나 전기를 끊은 전기기사나 자신의 실적을 위해 아파트에 선희를 입주시키려는 공무원이나 스스로 베푸는 행위에 도취되어 가식적인 태도를 취하는 교회 후견 봉사를 하는 오빠나 모두 다 하나같이 선희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발만 동동 굴릴 따름이다. 그리고 책임은 모르는 척이다.
사실 누구나 자신의 등뒤에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은 돌아봐주기만을 기다린다는 교회오빠의 이야기는 타인의 삶에 대한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성공한 위인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 그럴 듯하게 들리듯 자신보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던지는 격려는 지닌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오만함에 가깝다. 선희의 어려움 앞에 극복이라는 명제를 짐짝처럼 내세우는 이 사회의 친절한 오만함 앞에서 짝잃은 반달곰의 울음이 날카롭게 들리는 것은 그 어리석은 가르침에 대한 모멸감 그 자체이다.
비현실적인 엔딩이 상징적인 변주로 다가오는 작품으로써 소재를 인용해 차별의 현상을 탐구하는 이야기적인 능력이 잘 극대화된 작품이다.
<험난한 인생> - 노동석 감독
검은색은 나쁘다. 흰색은 착하다. 색은 하나의 상징이다. 악마는 항상 검은색을 띠고 천사는 항상 흰색을 띤다. 물론 이는 잠재된 서구 우월주의적 역사 근원에서 비롯되는 뿌리깊은 오류지만 어쨌든 단단하게 굳어버린 편견은 하나의 상징적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백인과 흑인. 같은 외국인이지만 그들을 각각 바라보는 시선은 차이가 있다. 그사람의 신원조차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피부색만으로도 사람의 인격을 구분한다. 백인에게는 경외감을 흑인에게는 모멸감을.
이영화는 우리에게 뿌리깊게 박혀있는 편견적 차별을 동심을 통해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또한 더불어 우리의 세태 자체를 영화에게 드러내며 편견이라는 의식자체가 세대를 통해 대물림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런 상황은 무지한 소견에서 비롯된 아이들의 유치함으로 치부될만도 하지만 유년시절부터 뿌리깊게 박혀가는 차별의 모습을 대면한다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성인으로써 미래에 대한 우려를 감지하게 한다.
물론 그런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로맨틱한 소년 경수로부터다. 어머니의 우스꽝스러운 우려에도 불구하고 경수는 흑인소녀를 사랑한다고 당당히 고백한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외국인 못지않은 영어실력이 아닌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실한 인지라는 것이 이작품을 통해 발견된다.
엔딩씬에서 경수의 독창이 아련하게 심금을 울린다. 색깔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경수의 독창은 이 사회의 차별과 직면해야 할 어린 녀석의 험난한 인생앞에 붙들어주고 싶은 희망의 발견과도 같다.
<당신과 나 사이> - 이미연 감독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이야기는 딱 이 작품 속 부부에게 제시될 타이틀 같다. 여자는 결혼 후 자신의 삶을 아내에 결부시키고 아이가 생기면 엄마라는 직무에 시달린다. 물론 생계유지를 위해 아침마다 전쟁터같은 회사로 출근하는 남자들의 고생은 뭐냐라고 반문한다면 그 역시 무시하려는 수작은 아니라고 답변하겠다. 다만 그 사이에서 우월하게 위치를 독점하는 남편과 아버지로써의 남성적 고정관념에 대한 고찰이라는 대안을 제시해야 될 것이다.
결혼은 애정이 고착화되는 순간이다.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갈 것이라고 믿었던 부부는 서로에 대한 실망감을 공유하지 못한 채 도화선과도 같은 불만을 드리운 채 지낸다. 서로의 대안은 종종 다툼으로 귀결되고 생활은 지속된다.
부계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영역은 집안으로 한정되었다. 물론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진 현대사회에서는 집의 경계선을 탈피하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결혼이라는 족쇄를 차게 되면 그 현실도 판타지처럼 둔갑하기 일쑤다. 아내로써의 충실한 삶안에서 행복하리라던 호정(전혜진 역)은 점차 자신이 주부로써 굳어져가는 삶속의 무료함에 지쳐간다. 남편 대우(김태우 역)는 그런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며 남성으로써의 책임에 종사하는 자신의 처지를 방어하듯 내세운다.
자신의 고된 바깥생활을 호소하는 듯 하지만 그것은 실상 집안의 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대가성 발언과도 같다. 그런 가정내의 억압적 위계질서하에서 여자의 가정주부로써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여자로써의 삶은 부당한 책임적 소산물이다.
영화는 부부의 다툼을 노출시키며 일련의 논란을 부르고 직후에 대안을 제시한다.-남성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제도적 측면안에서- 마치 공익광고와도 같은 대우의 모습은 대안적인 제시임과 더불어 남성들의 핑계와도 같은 관념에 대한 비아냥과도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가능한 변화들에 대한 예시문은 블랙코미디와 같은 풍자적 희극이자 여성이라는 주체찾기의 작은 목소리다.
가정이라는 공인된 울타리내에서 관행처럼 굳어진 고정관념에 대한 발견이 이 작품의 날카로운 시선이며 고정관념처럼 굳어진 성역할에 대한 고민을 부여하는 작품이다.
<BomBomBomb> - 김곡 & 김선 감독
퀴어들에 관한 잡담은 문화계의 화두다. 영화를 비롯해 각종 매체에서 대뤄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일련의 매니아층마저 지닌 듯 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할까.
남자고등학교는 일종의 남성적 힘이 지배하는 폐쇄적인 알력의 학습장이다. 남성들간의 우정은 그곳에서 상징적인 산물이다. 의리와 우정. 하지만 그 선을 넘은 애정은 결코 용납되기 힘들다. 비단 사회에서도 우호적인 건 아니지만 아직 성숙되지 못한 의식수준에 머문채 신체의 발육이 그를 앞서는 그 시기의 남성에게 동성애는 하나의 모욕감과도 같다.
대한민국 학창시절 가장 큰 교육은 획일화다. 마치 잡초를 치듯 규격화된 학생들을 양성하는 교육현실에서 아이들은 일탈을 꿈꾸지만 그 안에서 세뇌되어가는 집단주의적 귀속감의 주입은 은연중에 일어난다. 다수의 집단안에 속하지 못하는 이는 도태된다. 다른 것. 우리안에서 따로 노는 것. 그것은 응징의 대상이 된다.
동성애자라는 낙인에 찍혀 학우들의 모욕적인 린치에도 묵묵히 침묵하는 마선의 모습은 단지 동성애자라는 타이틀을 변명처럼 씌우지 않아도 되는 일반적 양상이다. 소수에게 가하는 다수의 암묵적 폭력. 전체가 가는 방향안에서 말살당하는 소수의 존엄성. 그것이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이고 외면되는 진실이다. 그리고 그런 적나라한 현실은 학교라는 울타리를 건너가며 근원적인 출입구를 탐구하게 한다.
마택은 그런 이들 가운데 양심의 소리다. 물론 다수의 강요와 질시에 잠시 위선의 탈을 쓰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양심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 마선에게 손을 내민다. 마선은 그런 마택에게 말한다. '우리 쟤네들 다 죽여버릴까.'
마치 락의 저항정신이 표출되듯 그들은 자신을 교실에 가둬놓고 비웃는 학우들에게 보란듯이 연주를 들려준다. 비폭력과 평화를 부르짓듯 우드스탁과 글래스톤베리의 페스티발을 연상시키듯 자신들에게 집단적 폭력을 잉태한 타인들에게 저항의 사운드를 펼친다. 동성애자 혹은 연인관계라는 것이 진실이든 오해이든 그건 관계없다. 그것이 마치 불순한 삶이라도 되듯, 응징받아야 할 범죄라도 되듯 내몰려야 되는 상황에 대한 저항. 집단이라는 형태안에서 안주하며 숫자의 크기가 도덕성의 유무로 판별되는 잘못된 관행에 대한 비판의 울림이 이 작품의 주제가 아니었을까.
<나 어떡해...> - 노동석 감독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는 벌써 몇년전에 대두되었건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과연 그들에게 대안은 있는가. 그것은 개인의 문제인가 혹은 집단적 제도적 양상의 문제인가.
'다섯개의 시선'에서 장진 감독은 이 문제를 다소 재치있게 풀어냈다. 장진 특유의 웃음이 가미된 '고마운 사람'이 비정규직이라는 문제를 유신시대의 맥거핀을 섞어내며 우회적인 재담처럼 털어놨다면 이작품은 비정규직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한다.
같은 일을 하지만 정규직에 비해 대우도 낮고 반정도의 급여만이 쥐어진다. IMF이후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은 울며겨자먹기로 비정규직으로 편입해들어갔고 그때 비정규직에 편입된 그들은 여전히 그 굴레안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비정규직들이 당하는 불평등 처우 사례를 도씨(정진영 역)에게 일회적으로 몰아서 편집적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모습은 사실을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충격적인 고발일수도 있고 더불어 개인적인 아픔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유발한다. 더욱이 실제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이들의 인터뷰는 사실성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되며 이런 현실안에서 신음하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불거진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민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노동석감독은 어떤 픽션도 설정도 가미하지 않은 실제적 사례들을 한 인물에 담아 투영했다고 스스로 말했다. -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석상에서 발언함.-
마치 계급을 나누듯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에 놓여진 선은 권력을 쥔자의 횡포에 가깝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기는 힘들고 작은 실수로 내몰리기는 쉽다. 마치 살얼음판같은 사회현실안에서 말못할 시름만이 쌓여가는 그들에게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라는 타이틀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민감한 소재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이 작품은 고발에 가까운 이야기를 개인적인 일과에 담아 비극적인 감성을 도출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수면위로 띄운다.
이렇게 여섯개의 시선이 세번째 시선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난 두번의 프로젝트에 이어 연작의지를 고스란히 담아낸 '세번째 시선'이라는 타이틀로 다시 찾아온 프로젝트는 과거보다도 더욱 확장되고 세밀해진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많은 오류적 관행들을 꼬집고 개개인의 안주되는 성향적 편견을 지적한다.
유능한 감독과 배우들이 모여 보여주는 다양한 이야기와 그로 인해 도출되는 솔직한 자아비판과 내면적 성찰이 주는 즐거움과 진솔함의 미덕. 이것이 이 프로젝트가 계속되어야 할 이유이자 이 프로젝트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까닭아닐까.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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