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겨울이 다 와버린거 같은데
가을로...
왠지 슬프다.
‘가을로(감독 김대승 제작 영화세상)’는 사랑해서 슬픈 이야기다. 사랑하는 이를 사고로 잃고, 그 추억을
따라가다 새로운 인연을 맺고 상처를 위로받는다. 한 공간 안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묘한 앙상블을 이
룬다.
현우(유지태)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민주(김지수)에게 청혼한다. 행복에 젖어 쇼핑을 함께 하기로 한 두
사람. 급한 일이 생겨 민주 혼자 백화점에 보낸 뒤 뒤따라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현우 앞에 거짓말처럼 건
물이 무너져 내린다. 10년 후, 따뜻한 변호사가 되고 싶다던 현우는 차가운 검사가 돼 있다. 민주가 남기
여행 노트를 따라 길을 나선 현우. 그 여행길에서 자꾸만 낯선 여인 세진(엄지원)을 마주치게 된다.
“안 보면 잊혀진다. 사라지는 것은 아쉬울 뿐”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의 말이다. 그러나 절실
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니다. 현우는 사랑하는 이의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
아간다. 그날 짜증을 내고 보낸 그녀를 왜 잡지 못했는가하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산다. 보이지 않는 그녀
가 눈앞에 있을 그때보다 더 그립다는 것을 알고 아파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남자는 세상 끝 절망을 본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옛 추억에 얽매여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애달픈 인간 군상을 닮았다. 영화는 그 치유제로 여행을 권한다. ‘바다 위에 섬이 있다’는 말로 시작
된 여행은 끝날 쯤 마음이 풍부해질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새로운 인연을 연결시켜
준다. 그런 점에서 현우는 우리의 초상이며 눈물이고, 바로 우리 자신이다.
슬픈 사람은 슬픔의 진정한 의미를 알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프지 않는 이들은 저 슬픈 사람들이
모르는 자신들만의 슬픔을 본 적이 있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그것이 내 것이 된 적이 있다고 믿는다. 슬
픈 이의 슬픔은 슬픔 그 자체로 끝나지만, 우리가 만난 슬픔에는 눈물이 어려 있다. 그리하여 그 슬픔은 황
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않고, 번쩍거리지 않는다. 잃어버림과 미치지 못함은 분명 슬픈 일이다. 그러나 슬
픈 사람에게도 신은, 운명은, 자연은 새 삶을 살아가라고 밀쳐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끔 눈물 흘리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감독은 특유의 연출력으로 인물의 심리는 물론 여행지의 빛 하나도 인상적으로 잡아낸다. 하지만 풍경의
아름다움이 영화의 이야기, 창을 가릴 정도다. ‘그 곳에 가고 싶다’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을 추천받
는 느낌마저 받는다. 캐릭터는 묻히고 도드라진 것은 풍경과 김지수가 들려주는 시어다. 더구나 사랑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아파하는 감정이 터뜨리지 못하고 앓고 있는 것만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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