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꽤나 즐겨보던 프로그램 중에 이런 게 있었다. 모 프로그램의 한 코너였는데, 타이거마스크를 한 마술사가 나와가지고는 신기한 마술들을 실컷 보여주고 나서는 그 마술이 실은 이렇다면서 관객을 속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처음 마술을 볼 때에는 저런 것도 속이는 기술이 있을까 하다가도 막상 그 사람이 비결을 가르쳐 주면 조금만 기술이 있으면 별것 아닌 것처럼만 보였었다. 마술을 보면서도 늘 마음 한구석에 저것도 어떻게 기술이 있을텐데 하고 의심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호기심을 시원하게 풀어줘서 그런지 이 프로그램이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한편으로 보면 마술에 관한 한 "스포일러"나 다름없다. 결말을 알고 영화를 보면 재미가 없듯, 이제 이 사람이 비법을 보여준 마술을 다른 곳에서 보게 되면 "저건 사실 이렇게저렇게 하는거야"하면서 방법을 다 알아맞춰 버리기 때문에 일찌감치 김이 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마술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감쪽같이 속인 걸까"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막상 비결을 알고 나면 대단히 싱거워져 버리는 게 사실이다. 영화 <프레스티지>가 이런 고약한 호기심을 가진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일 경우도 있다고.
때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려 하는 무렵. 두 젊은 마술사 로버트 앤지어(휴 잭맨)와 알프레드 보든(크리스찬 베일)은 나이많은 마술 기술자 커터(마이클 케인)를 고문 격으로 두고는 최고의 마술을 위해 때론 협동하고 경쟁하기도 하는 동료 사이다. 그들은 늘 로버트의 아내 줄리아(파이퍼 페라보)가 참여하는 수중탈출마술을 도우며 최고의 위치를 지키면서도 보다 충격적이고 놀라운 마술을 끊임없이 연구하는데, 그러나 이 수중탈출마술로 인해 둘 사이는 급격히 틀어지고 만다. 수중탈출마술이 실패하면서 줄리아가 목숨을 잃고 이에 관련해 앤지어와 보든 사이가 원한관계에 휘말린 것이다. 그 뒤로 갈라선 둘은 서로 더 놀라운 마술을 선보이기 위해 온갖 장비와 기술들로 경쟁하고, 서로를 극심하게 방해하기도 하며 대결을 펼친다. 그러던 중 보든이 앤지어에 앞서 마술의 최고 경지라는 순간이동 마술을 완벽하게 성공하고, 이에 자극받은 앤지어는 순간이동 마술에 있어 보든을 제치기로 마음먹고 올리비아(스칼렛 요한슨)라는 여인을 도우미로 고용하면서 온갖 방법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순간이동 마술이라는 궁극의 마술을 향한 두 사람의 경쟁은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기 시작한다.
근래 헐리웃 메이저 영화들 중에서 보기 드문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사실 <메멘토> 이후의 놀란 감독 영화들은 죄다 놀라운 캐스팅들이었다) 그에 걸맞는 알찬 연기력들의 향연으로 입맛을 더욱 돋군다. 휴 잭맨과 크리스찬 베일의 카리스마 대결은 불꽃이 튀여 델 정도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더불어 극중 성격이 예민해서 비교적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휴 잭맨의 연기, 상대적으로 거칠고 투박하지만 묵직하고 의미심장하게 감정을 전달하는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는 각자 나름대로의 선이 뚜렷한 매력이 있어서 연기 참 튼실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특히 마술을 둘러싼 경쟁이 갈수록 극에 달하면서 두 사람의 성격 또한 초반의 그나마 둥글둥글한 모습에서 갈수록 모나게 변해가는 과정이 탄탄한 연기력에 힘입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이들의 든든한 고문이 되어주는 기술자 커터 역의 마이클 케인 역시 예의 나지막한 영국식 악센트와 더불어 무게 중심을 든든히 잡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날카로운 구석도 찾아볼 수 없이 오히려 너무나 인자하게 마술 세계에서 기술을 전수하는 그의 모습은 든든하면서도 냉정하게 다가와 마술 세계의 살벌함을 상대적으로 부각시켜주는 듯하다. 스칼렛 요한슨은 이 영화가 홍보되는 과정에서 언급되는 만큼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두 남자 주인공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며 긴장감을 선사하는 팜므 파탈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두 남자 주인공의 연기 대결이 워낙에 불꽃 이 팍팍 튀어서 상대적으로 정말 처음 크레딧 때 "AND"와 더불어 등장한 것처럼 "특별출연"의 냄새를 조금 풍기기도 한다. 그러나 많지 않은 비중이라도 그녀가 보여주는 도도한 섹시함은 금상첨화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는 가수로 더 유명한 데이빗 보위까지 대단한 발명가인 "테슬라"로 등장해 뭔가 범접할 수 없는 듯 오묘한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메멘토>에서 막상 펼쳐놓고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건을 시간을 역행해서 배치하면 얼마나 머리가 깨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번 <프레스티지>에서도 <메멘토>보다는 심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시간을 또 쪼개는 기술을 선보인다. 앤지어와 보든이 동료일 적부터 쭉 내려오는 시간, 앤지어가 홀로 보든의 비법을 캐기 위해 미국으로 간 이후의 시간, 그리고 뭔가 대단히 중요한 사건(영화 처음부터 나오긴 하나 스포일러상 얘기하지 않겠다)이 발생한 이후의 시간으로 나눠져서 총 세 부분의 시간대별로 극이 전개되는데, 그래서 각 시간의 틈 사이에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따라가보는 재미가 꿀맛이다. 물론 수시로 시간대가 별도의 안내없이 바뀌기 때문에 흐름 놓쳤다간 매우 헤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는 것이 좋다.
이런 데다 놀란 감독은 소재부터가 진실과 거짓을 알 수 없는 "마술"이라는 소재를 끌어들여서 관객들로 하여금 잠시도 눈을 떼는 시간이 아깝게 만든다. 시작부터 두 사람이 펼치는 각종 마술들-수중탈출 마술, 새장 마술, 총알잡기 마술, 순간이동 마술 등은 두 주인공이 그 방법에 있어서 보다 고도화, 체계화된 방법들을 연구하고 실현하면서 다음은 어떤 수준의 마술이 될 것인가 하는 기대감을 선사한다. 보다 감쪽같고 완벽한 마술을 위해 이 인물들이 과연 어떤 방법까지 동원할 것인가 한번 보자 하고 팔짱을 끼며 지켜보는 재미 말이다.
그러나 이런 두 인물의 마술 대결이 서로의 방해공작으로 매번 실패를 거듭하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이야기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대로 서로 당하고 복수하는 식으로 간다면 이 대결이 언제 어떻게 매듭지어질까 하는 질문도 하게 되면서 말이다. 서로를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고, 그런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인물들의 성격까지 걷잡을 수 없이 변해가면서 영화 속 마술은 단순히 눈속임을 통해 쾌감을 주는 즐길거리에서 머물지 않고 두 사람의 삶과 관객의 생각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혼동하게끔 만드는 마법을 발휘한다. 마술에 있어 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마술처럼 진실과 거짓의 경계 사이에서 놀게 만들고, 속임수와 진짜 기술 사이에서 끊임없는 혼란을 겪는다. 그들은 남들을 성공적으로 속이기 위해 경쟁상대는 물론 자신의 인격마저 속이고, 상대를 꺾기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고안해내는 기술들은 단순히 현란한 재주를 넘어서서 위험이 수반되는 거대한 도박이 되어간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마술 대결이 살벌한 전쟁으로 변해가면서 밝혀지는 결말 또한 나름 충격적이라 할 만하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조금 예상을 한 바가 없지 않으나(그래도 세세한 복선에 있어서는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그 결말 자체만 놓고 반전이라 놀랍고 충격적이라는 건 아니다. 다만 남을 속이기 위한 두 사람의 치열한 대결이 이렇게 말도 안되는 결과까지 가져왔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잠시라도 바보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경쟁에서 불이 붙은 두 사람은 결국 끝에 가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이 모두 위태로워질 수 있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에 이른다. 속임수의 범위에서 그치지 않고 진짜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진실을 낳게 되는 것이다. 결말 자체는 생각보다 반전이 강력하진 않지만, 극심한 경쟁 끝에 그만한 결과를 불러왔다고 생각하면 꽤나 충격적이라 할 만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술은 근본적으로 속을 때 최고로 즐거운 엔터테인먼트이다. 누구나 보면서 "저건 분명히 어떻게 속임수가 따로 있을텐데"하면서 꿍꿍이를 캐려고 하지만, 실은 이 정도 호기심에서 그치는 것이 마술을 가장 즐겁게 볼 수 있는 비법이다. 때론 그 방법을 알기 위해 깊이 들어갔다가 별 것도 아닌 듯한 공허감에 빠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또한 어쩌면, 영화 속 두 주인공의 경우처럼 우리가 속임수의 오락이라며 그저 가볍게 봤던 마술의 이면을 섣불리 파헤쳤다 충격적인 "진짜" 실체를 마주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여러 편에서 관객의 두뇌를 가지고 놀기 좋아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렇게 이 영화를 통해서 때론 일부러 파헤치지 않고 그냥 순순히 속아줄 때 가장 극대화될 수 있는 독특한 성격의 오락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더불어 관객들에게도 영화 역시 한편으론 마술과 같다는 걸 주지시키며 농담삼아 충고를 던져주는 듯하다. 반전이 있는 영화를 볼 때에도 섣불리 결말을 알려고 덤벼들지 말고 그저 흐름을 따라가면서 기꺼이 뒤통수를 맞아주는 쾌감을 만끽하라고 말이다.
영화 <프레스티지>는 간만에 등장한 굉장히 매끈한 헐리웃산 스릴러다. 주인공들의 마술 테크닉처럼, 요란하진 않지만 치밀한 기술로 관객의 주의를 끊임없이 집중시키고,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와 지속적으로 휘몰아치는 이야기 전개에 힘입어 130분의 긴 상영시간임에도 스릴러로서의 긴장감과 속도감을 끊임없이 유지시킨다. 또한 앞서 말했듯, 결말의 놀라움은 몰라야 더 재밌는 마술의 미덕을 새삼 환기시킴과 동시에 영화란 것도 때론 몰라야 더 재밌는 마술과 같은 재미를 주는 경우가 있음을 증명한다. "마술의 신비, 마술의 신비" 그러지만, 마술이란 말 그대로 신비에 싸여 있을 때 가장 놀랍고 재미있다. 그런 마술과 같은 재미를 가장 잘 느끼려면 이 영화의 카피이자 영화 속 대사 중 한 대목에 현혹되지 마라. "Are you watching closely?"(가까이 보고 있습니까?). 마술사는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진실을 확인하라고 유혹하지만, 관객은 본능적으로 한발짝 떨어져 미지의 상태를 유지하게 되어 있고, 그것이 또 보다 온전한 쾌감을 위한 어느 정도의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모르는 게 더 효과 좋은 약이 될 때가 바로 이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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