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가을이 되면 유난히 옆구리가 싸늘해진다느니, 센티멘털해진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잎들로 시야를 가득 채우던 여름을 지나 가을이 보여주는 풍경이란, 누런 나뭇잎들이 하늘하늘 떨어지며 바닥을 뒤덮는 것이 상대적으로 쳐지는 분위기이기 때문일까. 새로운 걸 얻어가고 점점 성장해가는 분위기라기보단 무언가를 잃어가고 점점 퇴색해지는 듯한 분위기가,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분위기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무작정 무언가를 잃고 또 시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시간엔 딱 끝을 맺는 경계가 없이 다시 봄으로 간다. 또 생명을 얻고 자라나는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다.
이 영화 <가을로>는 이렇게 이름만 들어도 서늘하고 쓸쓸한 낭만이 느껴지는 가을이라는 계절 속에서 중요한 것을 잃었다고만 생각하는 이들이 펼쳐가는 이야기다. 그들은 차라리 속편한 우리들처럼 분위기상 상실의 계절같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말 무언가 소중한 것, 아니 것이 아닌 사람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들이 결코 "잃은 것"만은 아님을 이야기한다.
1995년 여름, 이제 막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변호사를 향한 다부진 꿈에 부푼 청년 현우(유지태)에게는 밝고 사려깊은 교양프로 PD 민주(김지수)라는 사랑스런 연인이 있다. 그들은 이제 현우의 청혼으로 막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가 된 상태. 결혼을 앞둔 기대감으로 둘은 백화점에서 혼수 쇼핑에 나서지만, 막 검찰청 신입으로 바쁜 현우는 일찌감치 도착한 민주를 불가피하게 기다리게 할 상황에 처한다. 뜨거운 뙤약볕에서 홀로 기다리는 게 안쓰러울 것 같아 현우는 민주더러 백화점에 들어가 혼수 구경을 하고 있으라 하고, 민주는 싫다고 하지만 마지못해 백화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뒤늦게 일을 끝내고 백화점으로 향하는 현우. 그런데 현우가 바로 보는 앞에서 백화점이 신기루처럼 무너져내린다. 그리고 그 안에 민주도 있었다. 그렇게 너무도 순식간에 너무도 허망하게 현우는 민주를 잃었다. 그 후 10년 뒤, 연인을 잃은 아픔은 너무나 짙어서 늘 웃음을 달고 다녔던 현우는 이제 무표정하고 무감각한 검사가 되어버렸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민주가 남겼던 10년전 수첩이 배달되고, 현우는 그 수첩 속에 적힌 민주의 기나긴 여행기를 발견한다. 바쁜 사건을 뒤로 하고 잠시 쉴 기회를 갖게 된 현우는 "현우와 민주의 신혼여행"이라는 제목 아래 담긴 그 여정을 따라가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그 여정 속에서 세진(엄지원)이라는 여인과 계속 마주친다. 똑같은 장소에서 만나고 그녀 역시 민주가 남겼던 이야기들을 읊는데, 그렇게 마주친 세진과 함께 현우는 과거의 상처를 지우기 위한, 혹은 보듬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이 영화는 멜로라는 장르를 달고 있긴 하지만 남녀주인공들의 사랑이라는 좁은 범위에만 틀어박혀 알콩달콩하고 눈물만 짜는 게 아니라 현실화되었었던 아픈 기억 속에 속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때문에 연기력 역시 예쁘고 애절하기만 한 게 아니라 어딘가 현실의 아픔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다. 주인공 현우 역의 유지태는 <동감>, <봄날은 간다>에 이어 또 한번 그가 멜로에 얼마나 잘 맞는 배우임을 상기시키며 아픔 속에서 성장하는 남자의 모습을 연기한다. 일관된 성격을 지닌 전형적 캐릭터가 아니라 밝음과 어두움, 냉정함과 감성적인 면을 오가는 캐릭터인데 그런 점에서 유지태는 상실의 아픔 앞에 유약하기만 하다가 점차 성숙해 가는 남자의 모습을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슬픔과 편안함이 함께 느껴지는 눈빛, 절제하면서도 그 속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내재할 줄 아는 표현력은 멜로 연기라는 틀 안에 국한시키기 어려운 깊은 내공을 보여주었다. 특히나 이 영화가 내용상 두 주인공의 쿵짝이 대다수가 아니라 현우 한명을 중심으로 끌고 가는 부분이 많은 편이었는데, 이런 깊은 내공 덕분에 영화가 더 알차게 감정을 자극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두 여배우 김지수와 엄지원의 연기도 탁월하다. 김지수는 생각보다 출연하는 비중은 많지 않지만, 그녀의 역할인 민주가 현우의 여정에 끼쳤을 영향을 생각하면 관객이 체감하는 비중은 주인공에 손색이 없을 따름이다. 김지수는 역할 특성상 자칫 이미지 중심으로 각인되었을 수 있을 역할을 발랄함과 간절한 진심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연기로 더 생기 있게 만들어주었다. 특히 후반부 사고 장면에서 보여주는 제한된 공간 내에서의 감정 연기는 그 절실함이 사실적으로 와닿아 상당한 감정적 울림을 던져준다. 엄지원 역시 유지태와 김지수와 비견해 전혀 뒤쳐질 것이 없는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다. 현우와 마찬가지로 쓰라린 아픔을 간직한 채 그것때문에 지금까지도 고통스러워 해야 하는 이의 모습을 세밀한 행동과 표정으로 소화해냈다. 역시 후반부 아픔을 풀어놓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급격히 쏟아지는 감정의 표현이 상당히 마음을 울리며 연기력이 제대로 성장했음을 실감케 해주었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일단 배우들의 연기 면에서부터 제대로 굵직한 연기력의 성찬인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멜로라는 얄궂은 하나의 장르 안에 국한시키기도 좀 그렇다. 부쩍 현실에 천착한 멜로영화들이 많지만, 이 영화는 특히나 우리가 실제로 겪었던 특정 사건을 배경으로 보다 민감할 수도, 더 아플 수도 있는 현실에 천착한다. 그러면서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 이전에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들이 희생당해야 했던 그 사건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을 떠나서 똑같이 아파하는 사람들 간의 치유 과정에 대해 침착하게 따라가고 있다.
언뜻 보면 "백화점 붕괴"와 "여행"이라는 두 소재는 잘 매치가 되지 않는 듯하다. 실제로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보여지는 백화점의 붕괴 장면은 생각보다 굉장히 파워풀하게 펼쳐져서 정말 사고 당시의 참혹함과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관객들에게까지 그대로 전달한다. 늘 영상을 통해선 무너진 후의 백화점의 잔해만 봐 온지라 막상 영화를 통해서라도, 눈 앞에 있던 백화점이 가차없이 무너져내리는 광경을 보니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꽤 놀라기도 했다. 그런 만큼 영화는 멜로영화로서의 아름답고 애잔한 영상과 감정을 보여주기에 앞서 험했던 지난 날을 보여주며 그만큼 만만치 않은 현실을 밑바탕에 깔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사고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고 너무나 오랫동안 아파해야 했던 등장인물들이 그 진통을 풀어가는 방법은 그만큼 격하지 않다. 점차 날씨도 선선해지고 그만큼 기분도 쓸쓸해지는 듯한 가을, 이미 떠나간 이가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가면서 그 떠나간 이가 느꼈던 기분들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사실, 순식간에 많은 것을 앗아간 이 사고는 살아남았든 희생을 당했든, 모든 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에겐 그 자체로 뼛속 깊이 찌르는 상실의 아픔을 가져왔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언뜻 경외의 대상처럼 보일 것 같은 이들에게도 실은 곁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죽음보다 긴 듯한 고통의 순간을 맛봤던 것을 고스란히 떠올려야 하는 아픔을 남겼다. 그러나 이들이 그 부재로 인해 아파했던 떠나간 이의 모습은 어둡지 않다. 오히려 여전히 현우에게 천사같은 웃음으로 남아 있는 민주는 아픔으로 잔뜩 찌든 그의 내면 위에 휴식의 순간을 마련한다. 살랑거리는 바람 속에서 마음까지 여유로워지며, 결코 그가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말이다.
영화 속에서 현우와 세진이 따라가는 곳곳의 풍광은 정말 나도 하나하나 기록해 놓고 짬이 되면 따라가고 싶을 정도로 깊게 인상에 남는다. 우리나라엔 없을 것만 같은 사막(이라기보다는 모래언덕에 가깝겠지만)의 모습도 흥미롭거니와, 산과 절 주변을 물들이는 수채화같은 단풍의 물결, 생활의 숨결이 곁에 살아있는 국도 주변, 천사가 풀어놓은 실타래처럼 스크린에 가득차며 하늘거리는 갈대들의 풍경 등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을의 풍경은 스크린 속이지만 사진으로 담아두고 싶을 만큼 큰 여운을 남긴다. 하물며 직접 그 앞에서 자기 눈으로 바라보는 현우와 세진에겐 오죽 했으랴. 처음에 마냥 황량했던 모래언덕에서부터 시작해, 마지막 전신을 감싸는 따뜻한 빛깔로 가득한 숲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민주가 느꼈던 자연 앞에 벅찬 감정들을 그대로 따라간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가공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삶의 여유를 만들어가는 한국의 곳곳을 돌아보면서 그들 또한 가슴 속에 꽉 찼던 번민과 그리움을 한 짐 덜어낸다.
그렇게 여유롭게 짐을 풀어놓는 자연의 분위기 속에서, 현우와 세진 또한 더는 꺼내선 안될 것 같아 꾹꾹 눌러담았던 아픈 기억을 눈물에 흘려보내며, 아픔과의 작별인사를 준비한다. 마냥 바람이 차갑고 낙엽이 쓸쓸하게만 느껴졌던 가을이, 그 속에 과거의 고통을 실어보내니 치유의 계절이 되어버린 셈이다. 현우는 자신이 한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는 걸 그녀는 알까 하면서 미안해하고 후회하지만, 관객인 우리는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 사이로 더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이별을 해도 곧 그건 개의치 않아도 될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다. 떠난 이의 기억의 저장고는 남아 있는 이에게 또 다시 손길을 뻗치며 삶의 길을 만들어가는 데 영향을 미치고, 치유의 과정은 떠난 이에게서 남은 이에게로 강물 흐르듯 그대로 전해지니 말이다. "나침반의 두 바늘이 서로 정반대를 바라보고 있어도, 그들은 결코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민주 아버지의 말처럼, 삶과 죽음의 정반대 방향으로 틀어진 두 사람도 결코 다른 세계에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영화 <가을로>는 여름을 지나 가을로 가는 과정 또한 우리가 삶에 있어 한뼘 더 자라게끔 하는 원동력임을 가르쳐준다. 사람에겐 누구나 쓰라린 상실의 기억이 있고 그것 때문에 오래 아파하기도 하지만 치유 뒤에는 그 위에 새로운 길을 깔아 걸어나간다. 그러나 그 기억은 늘 그 밑에 있다. 우리는 그 아픈 기억을 무작정 지우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발판 삼아 밟고 나간다. 마냥 황량하던 마음에서 출발해, 그 아픔과 시련들이 우리 마음에 물을 줘 결국은 무성한 숲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픔들을 딛고 걸어나가면, 민주 말마따나 시작할 때 마음은 황량했으나 끝은 숲으로 가득찼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안타까운 이별만 부둥켜 안고 우는 게 아니라, 그들이 다시 일어서서 아픔을 아프다고 덮어두지 않고 새로운 길로 걸어나가는 과정을 사려깊게 비춰주기에, 이 영화는 우리의 감성을 참 잘 다독이는 영화라고 할 만하다. 그들은 이제 뜨겁게 아파했던 여름을 지나, 선선한 가을바람과 낙엽에 그 고통을 실어보내는 가을로 걸어나간다. 이렇게 생각하니 지금 지나고 있는 가을이 어찌 이리도 든든하게 느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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