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보고 리포트 쓰는게 숙제라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나는 원래 수동적인 인간이라서 제도나 강제성이 나를 떠밀지 않으면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잘 못하는 편이다. 어쨋든 이번에도 강제성에 힘입어 이 영화를 보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영화는 나에게 감정이라는걸 회복시켜 주었다.
나는 한참동안 환원주의적 사고에 빠져있었다. 좋게 말하면 나는 어떤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데 몰두해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 감정은 자연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전달물질들(neurotransmitter)이 신경의 말단(synaps)으로부터 나와 몸속에서 상호작용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만약 우리가 어떤 영화나 문학작품을 보고 울고 웃고 감동한다면 그 감정들은 우리자유의지로부터 나오는것이 아니라 그 영화의 어떤 전기적신호들이 내 오감을 자극하고 오감을 느끼는 수신기인 감각세포들이 그 전기신호들을 받아서 내 뇌로 보내주면 내 뇌는 이 전기신호들을 처리한 후 신경전달물질들을 내 몸의 여기저기로 보낸다. 그제서야 나는 감정이라는걸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입장에서는 감정이라는 것이 매우 우스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논리밖에 없다. 즉 중요한건 내가 감정을 느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어떻게 감정을 느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감정은 내 자유의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논리적 결과물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보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냥 멍하니 영화에 빠져서 감동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왜 감동을 느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즉 영화속에 등장하는 어떤 장치나 말들이 나를 감동시켰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예를 들어 태풍29호가 하는 매개 혹은 장애물로서의 역할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감독이 왜 사진가게의 시게 할아버지와 교장선생님의 사랑이야기를 집어넣었는지 알아내야 한다. 이 사랑이야기는 사쿠와 아키의 사랑에 대한 암시이고 복선이다. 할아버지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것처럼 사쿠도 아키를 먼저 또나보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올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유골이 할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처럼 아키의 유골도 사쿠에게 돌아올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마 할아버지의 사랑이야기가 우리 뇌에 전달된 시점에서 우리는 의식못할지 모르지만 우리 뇌는 막바지에 찾아올 감동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시험공부했던것들이 자면서 무의식중에 뇌속에서 정리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리고 시게할아버지의 직업이 사진사(?)라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결혼예복을 입고 사진찍으러 사쿠와 아키가 사진관을 찾았을때 자신이 잊혀지는게 무섭다며 아키가 말한다. "사진이니까 영원히 남겠죠?" 아마 그밖의 이유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이 대사 한마디를 집어넣기 위함이 할아버지가 사진관을 운영한다는 설정의 가장 큰 원인인것 같다. 그리고 아키가 "눈을떳을때 줄리엣의 기분은 어땟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죽엇을때의 기분은..." 과 같은 말을 한것도 역시 우리의 감동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이제 이러한 사전작업 위에다가 폭탄하나가 떨어진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우루루로 떠나려고 공항에 온 사쿠와 아키. 이때 아키가 던지 대사를 보자. "사쿠 생일이 11월3일이고 내생일이 10월28일이니까 사쿠가 이세상에 태어난 후로 내가 없었던 적은 1초도 없었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가슴속이 일정 정도 메어지기 시작함을 느낀다. 폭풍우로 비행기출발이 지연되고 아키는 쓰러진다. 그리고 아키의 마지막 녹음 테이프의 내용이 흘러나온다. 물론 이건 사쿠는 아직 못들었다. 관객만 듣는다. "나 곧 죽을 거야. 내일이 오는게 무서워서 잠들수 없어......너와 함께 보냈던 영원의 몇분의 1초까지도 내 삶의 보물이야......우리들 지금 헤어지지만 네가 어른이 되서 결혼하고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오늘밤은 잠들수 있어." 이쯤되면 우리는 가슴이 메어지는 단계를 지나 목이 메이는 단계에 이르는 자신을 깨닫는다. 그리고 시게 할아버지가 깔끔하게 이 영화의 주제를 말해주신다. "천국이란건 남겨진 인간들이 만든거야. 거기엔 그 사람이 있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 그렇게 생각하거라."
이렇게 이 영화는 수많은 장치들을 준비함으로써 우리의 뇌가 그 정보들을 재구성하도록 한다음에, 언제가 찾아올 감동적인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 심장(비유적 표현)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결과가 이끌어지길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에게 실험해본 결과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의 예측은 정확했다. 무언가 소화되지 않는 덩어리가 계속 나의 가슴속에서 꿈틀꿈틀하다가 막바지의 대사들 하나하나마다에서 카타르시스 비슷한걸 느꼈다. 예전의 내 사고방식으로는 이러한 내 감정들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아무 가치도 없다. 이 영화를 보는 순간에 이미 내가 영화 끝나고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지 정해져 있는데 이따위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로보트를 앉혀놓고 이 영화를 보여줬더라도 그의 사고회로를 인간처럼 프로그램해놓기만 한다면 이 로보트도 나랑 똑같은 정신상태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감동이라는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그저 기계적인 반응일 뿐인 것이다. 자유의지로부터의 반응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혹은 보고나서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유의지와 기계적반응은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이 주장에 대한 내 근거는 좀 궤변스러운데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 근거는 일반적으로 떠오를만한 그런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근거는 아마 이런식일 것이다. <똑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할 것이므로 이 반응의 차이점이 우리의 감동이라는 반응이 완벽한 기계적 반응은 아니다라는 주장의 지지근거가 될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이겠지만 예외인 사람도 있으므로 이건 결국 확률싸움이고 확률이라는 논의속에 자유의지가 등장할 수 있다.> 이런식의 주장은 그럴듯하긴 한데 '자유의지'와 '기계적반응'의 지위가 동등해 보이지 않으므로 이 둘의 관계에 양립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근거를 밝혀야겠다. 내 근거란 간단하게 말하면 모르는게 약이라는 것이다. 중요한건 여기서 모른다는건 알수있음에도 그 앎의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의미(즉 눈앞의 현실이 참담하여 일부러 눈을 감는 식의)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모르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분석하면서 여러가지 장치들과 상황들과 대사들에서 인과적으로 나의 감동이 이끌어졌다고 했을때, 사실은 이 인과적추론이 부정확할 가능성이 항상 있다. 왜냐하면 내가 설정한 원인과 결과 사이에 또다른 원인이 있을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시기에 맨체스터 공장 노동자들은 시계탑의 종소리가 울리면(오후8시에 울린다) 항상 퇴근을 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맨체스터공장 노동자들의 퇴근이라는 결과의 원인이 시계탑의 종소리라는 추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추론은 사실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퇴근이라는 결과의 진정한 원인은 퇴근시간이 8시라는 사실이지 시계탑의 종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계탑의 종을 오후4시나 5시나 6시에 쳐본다면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사우스 파크>>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내용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유전공학박사 메피스토는 카트만의 아빠를 밝혀내기 위해(카트만은 엄마랑 둘이 살고 있다.) 유전자 검사를 하고 이제 카트만의 아빠를 밝히려고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그런데 발표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정전이 되고 총소리가 울리더니 다시 불이 켜지자 메피스토는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여기서 내가 한 추리는 카트만의 아버지가 아마 범인일거라는 것이었다. 즉 카트맨의 아빠로 밝혀지면 자신이 엄청난 비용을 물어야 하는(예를 들면 지금 결혼한 상태라 이혼을 요구받을수도 있고) 사태등에 대해서 우려했을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진실은 이런것이었다. 메피스토박사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키50cm정도의 그의 형이 있는데 사실은 그의 형이 메피스토를 쏜 것이었다. 사실은 메피스토의 형은 크리스마스이브마다 메피스토를 총으로 쏘는 ceremony 혹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례는 진정한 원인을 밝히는데 실패한 나라는 인간의 사고과정을 보여준다.
'퇴근시간이8시'나 ‘메피스토형이 총을 쏨’ 같은 진정한 원인이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인과적 추론 사이에도 없으란 법이 없다. 즉 이런식의 해석을 해볼 수 있다. <시게할아버지와 교장선생님의 사랑이야기, 사진관, 시의적절한 대사들이 하는 역할이 감동의 극대화라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기초공사가 아니라 사실은 뇌의 정보처리량을 높이는 것이고 이 높은 정보처리량 자체가 뇌에서 감동호르몬을 분비시킴으로써 우리를 감동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되면 감동의 진정한 원인은 뇌의 높은 정보처리량이 된다. 즉 시게할아버지와 교장선생님의 사랑이야기, 사진관, 시의적절한 대사들이라는 속성들을 시게할아버지와 교장선생님의 난투극, 태권도관, 타란티노식의 수다들이라는 속성들로 교체해도 감동이라는 결과물은 여전히 얻어진다는 것이다.
중요한것은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신(여기서는 전지하다는 속성만 필요하다.)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행동과 반응은 결정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기계적이라는 것이다. 즉 존재론적으로는 기계적이라는 것이다. 이 결정론은 뉴턴역학의 운동방정식에 의해서 지지되기도 한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내가 영화보기전의 나를 포함한 우주를 구성하는 원자수준의 정보를 모두 운동방정식에 대입해서 계산하면 영화보고 난후의 나의 반응을 알 수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3 object problem' 이라는 것이 있어서 인간의 사고능력으로는 이 계산이 절대 불가능하다. 신만이 할 수 있다. 이렇듯 존재론적으로는 여전히 기계론을 유지하면서도, 우리는 어떤 현상의 진정한 원인이 A라는 것을 결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운동방정식을 계산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 이 증명할 수 없음이라는 인식론적 공백 위에서 우리의 자유의지론을 펼쳐볼 수 있다. 설명이 좀 길어졌지만 아무튼 이것이 기계론과 자유의지론의 양립에 대한 나의 근거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큰 감동과 함께 지금 쓰는 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고맙게 생각한다. 여기서 질문해볼 수 있는것은 이 영화를 본것이 내가 떠올린 아이디어에 대한 진정한 원인인가 하는 점이다. 내 설명에 따르면 이것을 알아내기란 시간적으로(계산이 복잡하므로) 혹은 현실적으로 결코 불가능하다. 이런식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현상은 우리 주위에 많이 널려있으니 다들 한번 시도해 보세요. 재미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필요한 것은 경제학이다. 우선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금방 답이 나온다. 평생동안 뉴턴역학의 운동방정식을 계산해서(가능하다고 가정하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보고 느낀 감동의 진정한 원인을 밝혀 냄으로써 얻는 효용이 더 큰지 아니면 그것이 불가능함을 시인하고 자유의지론을 받아들여 남은 여생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또는 ‘사우스 파크’ 와같은 영화들을 보는데 사용하여 얻는 효용이 더 큰지를 비교해보면 된다. 나같은 경우는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드디어 감정을 회복했다. 나의 감정의 신성함(?)을 증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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