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메이드 가족의 탄생
지난 여름의 초입에 '호로비츠를 위하여'와 함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희생당한 웰메이드 영화로 여겨졌던 '가족의 탄생'. 이른바 폐인들의 활약으로 장기상영에 들어가고 부상영평상 2관왕, 부산영화제 상영 등으로 근래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영화다.
당시 대안가족을 제시하고 기왕의 가족이라는 개념을 뒤집는 전복적인(?) 영화라는 평가도 받기도 했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이라는 둘레도 인간과 인간의 '정'이라는 것으로 충분히 맺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따뜻한 방식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을게다.
또한 세가지 이야기가 맥락없이 전개되는 옴니버스 형식을 띄면서도 마지막에 모든 이야기가 합쳐지면서 하나의 주제를 말하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어 주목받았다.
여성적인 영화? 나의 느낌?
이 영화는 여성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느낌이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왜냐면 왜 여성적이냐는 물음에 답할 요량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사실 여성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도 요령부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물여덟 생을 살면서 느껴온 여성적이다라는 것의 느낌과 부합했다면 조금 설명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여성적이라는 것을 '여성성'에 대한 관념적 해석에 기대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따스함, 정, 모성 그리고 외로움을 잘 참지 못하고 끝내 모질지 못한 여린 마음 같은 것. 그런 것들이 뭉뚱그려진 느낌. 대드는 아들의 모진 말을 듣고 몰래 혼자 우는 엄마. 매일 티격태격 하다가도 배고프다고 하면 라면 한 냄비 끓여 내오는 누이. 대판 싸우고 헤어지자 말해놓고선 며칠 안돼 전화해 안부를 묻는 여자친구. 이런 느낌.
감독이 말했듯 이 영화는 착한 축에 드는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는 예쁜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예쁘고 착한 것. 혹시 이것에서 여성적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ㅎㅎ 그럼 이건 남성의 언어가 되어버리는 건가?
파괴적 현실성
가족의 탄생은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다. 핸드헬드가 조장(?)하는 불완전성, 비전문성의 탓도 있겠지만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마치 내가 언젠가 내뱉었던 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직설적이다. 현실에서, 그럴 듯한 메타포를 사용하고 선문답식의 대화에도 서로의 진의를 알고 세련된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어디있겠는가.
"아저씨가 돈 달래지? 얼마나 달래?" "소리 좀 지르지 마. 됐어. 됐어. 됐어!" "그깟 연애가 뭐라구 증말~" "사람들이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용하는 거야. "너 너무 헤퍼!"
특히 가족 간의 대화는 직설적이고 배려없다. 그렇다고 솔직한 대화가 오가는 것도 아니어서 서로 오해하고 상처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감정이 상해도 조금만 에둘러 말하고 조금만 진중히 말하면 될 것을 틱!하고 내뱉고 팩!하고 돌아서니 문제가 된다. 물론 이건 연인 관계에도 마찬가지. 말로 싸우고 말로 상처주니 점점 말이 줄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얘기가 조금 샜다. 돌아오자면.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이 이런 꾸밈없는 대사와 작은 행동들에서 조금씩 구체화되고 일상적인 배경들과 중첩되면서 고도의 현실성을 갖는다. 이건 꽤 잔인하다고 할까. 홍상수식 낯뜨거운 현실성은 아니라하더라도 등장인물의 말과 감정에 강제로 이입되는 느낌. 달리 표현하자면 무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몰입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문제로 속알이 해 본 남성이라면 세번 째 이야기에서 봉태규가 연기한 경석에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또 엄마가 '지지리 궁상'을 떠는 모습에 넌더리를 낸 적이 있는 딸이었다면 선경(공효진)의 모습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혹은 집안에 무능하고 무책임한 인간군상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인물(특히 문소리가 연기한 미라)에게 동감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알량하게도(?) 현실을 정말 현실처럼 보여주고 그 인물들이 관객의 내면까지 침투하게 한다면 이건 꽤나 파괴적인 것이다. 영화를 보며 내심 판타지를 꿈꾸는 관객들에게서 일말의 환상도 남겨주지 않고 그들을 알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관객은 영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은 치욕이다.
소통까지의 여정
영화와 관객이 소통하는 방식 뿐만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소통하는 방식 또한 '애정'으로 말미암아 축적되고 '대화'로 길을 닦아가며 결정적인 순간에 '웃음'이나 혹은 '울음' 같은 감정의 '해소'를 통해 비로소 소통한다. 영화는 이러한 지난한 여정을 성공적으로 밟아간다고 볼 수 있다. 소통할 수 없었던 인물들이 소통하듯. '가족'아닌 가족으로서 에둘러지듯. 그렇게 영화는 관객과 소통한다.
영화를 보고 나니 알몸으로 서서 애완견을 안고 있는 느낌이 든다. 갑자기 애완견 얘기라 뜬금없겠다. 하지만 집에 들어와 꼬리치며 달려오는 당신의 사랑스런 강아지를 안아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말이 필요 없는 소통. 이미 앞선 성공적인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가능한 소통. 이런 관계라면 서로 바라만 보아도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이것도 판타지라면 할 수 없다.)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런 영화다. 비록 이 글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PS.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 배우의 역량은 때로 영화의 절반 이상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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