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국가의 부흥을 부르짖던 그 시절, 국가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전개된 국책사업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수도 없이 강요했고 천명했다. 그 피해의 중심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국가 발전에 저당잡혀 저임금과 농산물의 저가책정으로 피해를 고스란히 떠 맡았던 그들은 분명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시대의 피해자들이다. 더욱이 요즘 FTA협상 체결로 인해 농민들의 사정이 더욱 열악해졌음은 여전히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우대받지 못하는 피해자 역할을 이어오고 있음을 대변한다.
핵가족이 보편화된 요즘 인구의 증가폭이 눈에 띄게 줄고 오히려 감소하는 추세에 이르러 국가적으로 자녀출산을 장려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출산율을 억제하기 위해 정부에서 시책을 마련하던 시대도 있었다. 소위 말하는 가족계획이라는 쌍팔년도 뉘앙스의 공적사업은 그보다도 더 된 70년대의 추억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시절 그 이야기를 꺼내들며 지난 시절의 무언가를 돌이켜보려한다.
시작부터 보여지는 과거의 촌스러움이 지극히 묻어나는 공익광고의 주제는 저출산의 장려이다. 국가발전율을 앞지르는 인구증가율을 누르기 위해 정부는 노심초사하며 개개의 가정까지 출산을 감시하는 방안을 채택한다. 그분의 말씀대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전국 제일의 출산율을 자랑하는 용두리에 그들의 무책임한 야간문화를 바꾸고자 요원을 투입한다.
사실 이 영화는 과거의 것을 단순히 묘사한다기 보다는 시대적인 상황 자체를 전반적으로 풀어헤치는 듯한 시도도 엿보인다. 전근대적인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며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를 지속하는 시골 농민들의 열악한 모습과 순박함으로 미화하기에는 지난하게 무지한 이들의 몽매함. 그리고 이를 이용하여 더 큰 권력으로 그들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살시키고 강요하는 일방적인 정부와 그에 끌려가는 무지몽매한 민중. 그 모든 시대적 상황이 직간접적으로 보여진다. 마치 그 시절 독재에 억압당하듯 끌려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처럼. 국가의 발전을 볼모로 개인의 희생이 미덕처럼 여겨지던 그 시절을 말이다.
이 영화는 웃음을 담보로 시절을 풍자하고 해학하는 가능성을 엿보인다. 국가라는 권위적 기능성에 개인이라는 개별성을 박탈당하던 그 시절을 다시 돌이켜본다. 그러나 문제는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낯빛을 바꾸는 영화의 기세다.
선과 악의 대립관계가 극의 초반에는 극명하다.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며 영화는 그 대립관계를 희석시키고 종래에는 구별 자체를 없던 일로 돌려버린다. 물론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뽑아져 나오는 인간적인 감동 역시 간과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을 어정쩡하게 무마시켜버리는 형세다. 마치 전근대시대의 지주처럼 소작농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빚까지 지게 만드는 전 이장 강씨(변희봉 역)의 행태는 단순히 한번의 행위로 용서받고 덮어진다. 결국 변하는 건 없다. 빚은 여전하고 떠나는 것은 변석구(이범수 역)다. 잘살아보세라는 구호 뒤의 국가적 허영성을 어필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영화의 투명성을 강조하기 위한 작위적인 끝맺음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웃음과 감동 어느 것 하나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개인기가 줄충한 두 배우의 매력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영화자체가 짊어져야 할 감동의 무게감도 가볍다. 겉도는 웃음과 관객을 휘벼파지 못하는 플롯은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영화를 반 허공에 띄운다.
좀 더 세심하게 다듬었다면 그럴듯한 이야기가 될 법도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참신한 설정에 비해 영화는 졸속적인 끝맺음으로 하락한다. 시대적인 풍자성과 섹스 코메디적인 성숙함까지도 아우를 수 있었던 영화의 예감은 아쉬움으로 귀결된다. 결국 다시 돌아본 70년대는 현실이 무시되고 어거지로 추켜세운 부적절한 감동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만 같다. 무엇보다도 지나버린 과거의 씁쓸한 기억에 대한 풍자적 웃음을 줄것만 같던 기대감이 미화담으로 뒤돌아서버렸음이 가장 큰 배신감이 아닐까.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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