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뮤지컬 영화의 입지는 열악하다. 사실 영화를 떠나 뮤지컬이라는 공연 장르 자체가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이는 실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마치 그런 분위기에 보이콧하듯 뮤지컬을 표방한 영화들이 속속들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다. 삼거리 극장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전작들의 소심한 뮤지컬 방식의 차용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 작품은 본격적으로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영화로 가져다 세웠다.
삼거리 극장. 마치 변두리의 어딘가에 있을 듯한 낡은 극장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멀티 플렉스가 대세인 요즘은 보기 힘든 낡은 극장의 모습. 그래서 지금은 과거가 되어버린 스카라 극장이 떠오르기도 했고 조만간 폐관될지도 모른다는 서대문의 모극장이 떠오르기도 했다. 낡아빠진 것. 더이상 관객이 찾지않는 누추한 극장 한귀퉁이에 소복히 쌓여있을 먼지마냥 느껴지는 감성적인 쓸쓸함.
일단 글을 읽고 있을 그대가 공연문화의 매니아임을 자처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알만한 배우들은 거의 찾기 힘들다.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 종종 모습을 보이는 천호진을 포함해도 관객들의 이목을 잡아당길만한 스타성에 빌붙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 이 영화가 주력할만한 손짓은 바로 장르적인 독특함에 있다. 문제는 그 알수 없는 완성도에 대한 신뢰 생성 여부다.
일단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중적 구조를 띠고 있다. 전반부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발랄한 공연으로 꽉 채워져 있다면 후반부는 다소 엽기적이면서도 심오한 이미지의 나열이다.
시작부터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는 할머니를 찾는 소녀의 방황이 삼거리 극장을 마주하면서 모호함의 연막을 서서히 걷어나간다. 물론 속모를 이야기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심중을 알 수 없는 관객을 객석에 붙들어 놓는 것은 춤과 노래의 향연이다. 기괴함과 발랄함의 양면성을 동시에 갖춘 이 영화의 뮤지컬 씬은 매니악하면서도 대중을 소화해낼 수 있는 포용력을 지닌다.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은 수많은 공연으로 다져진 전문 공연 배우들의 연기적 완성도이다. 실력이 기반이 되는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살아있는 무대의 생동감을 스크린으로 옮겨놓았다. 오히려 무대의 제한적인 공간성이라는 약점을 카메라의 이동과 시선 처리로 무마시킨 것같은 인상이 들 정도다. 특히나 몇몇 넘버들이 지닌 후렴부분은 관객에게 깊은 중독성을 심어줄 정도다. -필자가 극장을 나설 떄 분명 노래를 흥얼거리는 관객들을 몇몇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분명 관객에게 낯설다. 가벼운 모양새를 띠고 있지만 영화는 분명 심오한 전달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메세지의 전달은 고의적인 조악함으로 무장한 은유적 어조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와 관객의 소통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가. 삼거리 극장의 현실은 우리 현실과 맞닿는다. 마치 대형 할인 마트나 체인형식의 기업적 편의점들에 밀려나가는 길거리 골목 슈퍼들처럼 단관 극장들은 멀티플렉스의 공세앞에서 맥없이 문을 닫거나 그와 비슷한 형태로나마 몸을 키워야 한다. 지향점은 예술이지만 상업적인 뒷받침이 마련되지 못하는 고고함은 무릎을 꿇는 세태다. 마치 삼거리 극장을 떠나지 못하는 혼령들처럼 소수의 관객들이 찾는 극장은 폐관되고 사라져가기 직전이다.
대중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분하는 점은 재미의 유발이다. 물론 재미라는 단어의 모호함을 좀 더 구체화한다면 쉽게 영화를 볼 수 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극 중 대사처럼 보지도 않는 영화를 왜 만드는가의 문제는 그 작품성에 대한 의지일 수도 있다. 다만 그 작품성이 인정받는 길은 험난하다. 마치 불쑥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미노수처럼 당황스럽다. 그래서 관객들은 마치 달아나듯 영화로부터 멀어진다. 이해할 수 없음. 쉽게 말하자면 재미없음이라는 간단명료한 부연설명으로 독특한 발상으로 관객에게 접근하는 영화로부터 달아난다. 그리고 좀 더 쉽고 만만한 영화앞에 당당히 관객으로써의 대접을 요구한다. 그리고 소수의 관객만이 접근하는 영화의 진위는 애처롭다. 마치 바다로 서서히 잠겨가는 미노수와 그의 연인처럼. 하지만 그 처연한 슬픔의 진실을 알아주는 이는 몇몇 뿐이다. 마치 관객들이 빠져나간 삼거리 극장에 남아있는 혼령들처럼.
쉽지 않다는 것. 물론 영화를 항상 무겁게 봐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영화를 항상 킬링타임용으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앞에서 예술적인 고민이 거론된다. 예술의 관람이냐 소비의 행태냐의 사이에서 간과되는 고민성. 이것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하는 메세지가 아니었을까. 또한 이 영화가 실질적으로 지닐만한 고민의 호소로도 여겨진다.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공연을 보는 것과 같은 흥겨움과 의중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의 난해함이 맞물려 있는 이 영화는 만만해 보이지는 않아도 선택할만한 그릇은 된다.
영화의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다면 2시간의 런닝 타임은 즐겨볼만한 무도회장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기나긴 고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영화는 신나고 즐겁다. 다만 낯설 따름이다. 그 낯설음앞에서의 망설임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망설임을 극복한다면 분명 신선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테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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