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해서 어머니 앞에서 자식들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어렸을 때 누구나 했던 생각이겠지만, 무슨 잘못때문에 어머니한테 오지게 혼나서 꺽꺽거리도록 울고 나면, 그 후 잠이 들면서 혼자서 "엄마는 내 맘 몰라도 한참 모른다. 다시는 엄마랑 얘기도 안할거야"하면서 서러워하지만, 다음날 일어나면 어머니가 차려놓은 따뜻한 밥상과 따뜻한 미소 앞에서 그런 마음은 시치미 뚝 떼고 금세 사라지지 않던가. 그만큼 어머니 앞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불만과 원망, 새삼스런 애정이 교차하곤 한다.
이 영화 <귀향>은 이렇게 때론 멀어지기도 하고 벗어나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걸 제자리에 있게 하고, 뿔뿔이 흩어져 있어도 결국 돌아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어머니의 힘에 대해 얘기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최루성으로 울리는 것도 아니고, 진부한 클리셰로 모성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라, 오랜만에 돌아오면 여전히 친구처럼 미소지으며 환영하고 있는 고향처럼 편안한 미소와 따뜻한 품으로 감동을 남겨놓으면서 말이다.
두 자매 중 언니인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는 무능력한 남편과 조숙한 딸과 함께 무던히도 열심히 살아간다. 남편은 만날 술을 벗하며 집에서 뒹굴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면서 딸을 챙기며 살고 있는 중이다. 동생인 쏠레(로라 두에나스)는 이혼을 경험하고 불법 미용실을 경험하며 혼자지만 역시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삶은 이모의 죽음을 전환점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절친한 이웃 아우구스티나(블랑카 포르틸로)가 보살피던 파울라 이모(커스 램프리브)가 돌아가신 뒤, 두 자매는 각자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문다에게는 어느날 딸 파울라(요한나 코보)가 자신을 덮치려는 아버지를 실수로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쏠레에게는 이모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무덤까지 있는데) 어머니(카르멘 마우라)가 같이 좀 살자고 와 있다. 어머니(또는 어머니의 유령)이 돌아오면서 새로운 사건들을 경험하는 자매, 이들의 삶 또한 조금씩 새로워지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는 순전히 여성들의,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에 의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성 감독이지만 여성의 심리를 이보다 더 잘 헤아릴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감각은 이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우선 대부분의 출연자부터가 모두 여성이다. 초반부에 죽음을 맞이하는 라이문다의 남편, 역시 초반부에 잠시 등장했다 이후에 잠깐 전화로만 나올 뿐인 이웃 에밀리오를 제외하면, 영화의 장면장면을 장식하는 거의 모든 인물은 라이문다, 쏠레, 라이문다의 딸 파울라, 자매의 어머니, 이웃 아우구스티나, 자매의 이모 파울라에 이르기까지 여성으로 이뤄져 있다. 여러 여인들의 여러 사연을 그리고 있는 만큼 이들의 연기력 또한 누구 하나 뒤쳐지지 않고 모두가 눈부시다.(난 처음에 페넬로페 크루즈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여기 나온 여배우 모두가 함께 여우주연상을 받았더라. 하긴, 페넬로페 크루즈만 주기에는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도 아깝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확실히 영어권 영화와 비영어권 영화에서 풍기는 포스의 차원이 다른 듯하다. 영어권 영화에만 가면 연기력보다는 얼굴과 몸매가 강조되는 역할을 맡기 쉬운데, 대신에 자국인 스페인 영화에만 출연하면 숨겨뒀던 연기력을 활짝 펼치니 말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제 서른이 넘은 여전한 미녀 배우인지라 다 큰 딸이 있는 엄마의 모습이 좀 안어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영화 속에서는 그런 우려를 충분히 불식시킬 만큼 억척스럽고 다부진 면모가 돋보였다. 영화 속에서도 "너 가슴 키웠냐?"와 같은 그녀의 외모 관련 대사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렇게 강렬한 외모는 연기력을 가리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영화 속 라이문다의 강인한 면모를 더 부각시키는 요소가 되지 않나 싶다. 스페인 특유의 시끄러운 어조로 동네 친구들과 흥정을 하고 수다도 떨고, 딸과 남편에게 잔소리도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줌마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압권은 그녀가 영화 촬영팀 쫑파티에서 기타 선율에 맞춰 노래 "귀향"을 부르는 장면이다. 어쩌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같은 이 노래 가사와 함께 지나온 삶의 회한과 그리움이 눈물 한줄기와 함께 만면에 펼쳐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카타르시스가 솟아오른다. 악착같이 살았던 지난날 뒤에 숨겨진 한과 서러움이 아마도 이 한 장면에 함축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짧은 순간에 참 많은 감정이 오가는 연기를 보여주다니, 그녀는 확실히 제대로 된 배우가 되었다.
두 자매 라이문다와 쏠레의 어머니 역을 맡은 카르멘 마우라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이 배우는 스페인에서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예전 작품들의 상당수에 출연했고, <커먼 웰스> 등 흥행작에도 출연하는 등 거의 국민배우 수준의 대접을 받는 배우라는데, 이 영화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그녀의 연기는 왜 그녀가 그런 호칭을 얻었는지 짐작케 해주었다. 유령으로 나타난 뒤 쏠레 사이에서 펼쳐지는 여러 비밀스런 에피소드들은 끊임없이 폭소를 자아내는 한편, 후반부 어머니로서의 애틋한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에서는 절제된 표정과 대사 소화를 통해서 거대한 감동의 울림을 전해주기도 한다. 한없이 웃기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무뚝뚝한 듯 오버하지 않는 진심으로 눈물 한방울을 남기는 그녀의 연기는 진정 보석같다고 할 만하다. 이외에도 얌전한 성격이지만 어머니와의 비밀 앞에서 생뚱맞게 변하기도 하는 쏠레 역의 로라 두에나스, 믿음직하지만 남모를 상처를 안고 아파하는 이웃집 여인 아우구스티나 역의 블랑카 포르틸로, 발육이 남달라 어른스런 티를 제법 내는 라이문다의 딸 파울라 역의 요한나 코보 등 이 영화는 근래 보기 드물게 여성 배우들의 연기력이 압도적으로 스크린을 수놓는 영화다.
사실 이전부터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하면 이름의 어감에서도 느껴지듯 마냥 도발적인 영화만 만들 것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최근 들어서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긴 했지만 바로 전작인 <나쁜 교육>도 소재는 매우 충격적이기도 했었고. 그러나 막상 이 영화를 보니, 도발적이고 화려하기는커녕 시종일관 따뜻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감독의 초기작들에는 코미디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갔다는데, 이 영화 역시 생각보다 웃게 되는 장면들이 많다. 엄마가 유령으로(것도 전혀 유령답지 않은 유령) 나타난 뒤 펼쳐지는 에피소드들도 코믹하고, 딸을 덮치려는 아버지를 딸이 죽였다는(실수이긴 하지만) 설정도 다분히 충격적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이끌어간다. 독특하고 파격적인 설정을 어느 정도 갖고 있긴 하지만,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억척스럽고 친근한 이들로 가득하고, 시종일관 재치넘치는 유머를 선보여서 보는 내내 기분나쁘지 않은 훈훈한 미소를 안겨주었다.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오는 영화의 스타일은 곧 영화가 감동을 주는 방식으로도 연결된다. 이 영화는 우리가 무수히 많은 예술작품에서 접해온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갖고 있지만, 절대로 어머니를 모든 걸 희생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이상적이면서도 진부한 이미지에 가두지 않는다. 어머니의 사랑을 시험하기라도 하는 듯한 상황을 설정해 눈물을 억지로 유도하지도 않는다. 앞서 말했듯, 유령이 되어 나타난 어머니와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 속에서 웃고 즐기다 보면 신기하게도 어느덧 거부할 수 없이 거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힘을 느끼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에서 어머니는 마냥 인자하고 따뜻한 이미지인 것만은 아니다. 두 자매가 어머니에 대한 대표적인 기억으로 "자기가 방귀끼면 자기 혼자 웃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정도로 엉뚱한 면도 있으며, 투덜거리는 면이 다소 있고 한편으로는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딸들을 헤아리지 못하는 면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어머니와 딸들의 관계는, 단순히 어머니가 압도적으로 위대하고 그런 어머니를 딸들은 무작정 우러러만 보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똑같이 약점과 아픔을 갖고 있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감정을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형식적 모녀 관계를 넘어서 보다 진심이 어린 인간관계로 발전해 가고 있다. 딸들 또한 그동안 자신에게 잘못 전해졌었던 어머니의 진심, 어머니의 실수를 이해하고, 어머니 또한 차마 몰랐던 딸들의 아픔을 되새기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적인 어머니의 존재 위치를 조금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전히 어머니라는 존재의 불가항력적인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죽은 줄만 알았던 어머니가 자매들 앞에 나타나게 되면서 그들의 삶에는 조금씩 변화가 찾아온다. 마냥 가난의 연속일 줄만 알았던 라이문다네 집에는 갑작스런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화색이 돌고, 이혼 뒤 외로이 불법 미용실을 하던 쏠레에게도 어머니가 룸메이트(?)로 들어오면서 외로움의 장막은 어느덧 걷혀 활기를 띠게 된다. 곧이어 어머니와 두 자매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서, 뿔뿔이 흩어져 가족임에도 서로의 상처는 각자 알아서 치료하며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그들은 새삼 서로가 안고 있던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듯 아늑함을 느끼게 된다. 서로 응어리져 있던 갈등의 뭉치들을 풀지 못한 채 찜찜하게 멀어져 있던 상황에서, 이제 어머니가 돌아옴으로 인해 그들은 따뜻한 시선으로 갈등을 조금씩 풀어나가며 다시금 예전의 행복했던 가족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흩어졌던 지난 시간에서 벗어나 그들이 고향에 다시 모이듯, 그 중심에 있는 어머니란 존재는 자식들에게 있어서 돌아가고 싶은,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고향인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의 귀환을 계기로 자매들의 삶이 바뀌게 되는 건, 죽은 줄만 알았던 어머니가 돌아온 것만큼이나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무슨 어머니의 마력이 작용했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을 떠돌다 자식들의 품으로 돌아온 어머니로 인해 그런 어머니를 맞이한 자식들의 삶도 방황을 멈추고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혼자 살던 이모에게도 어머니의 손길이 몰래 미쳤듯, 이렇게 자식들의 원상복귀에도 알듯 모를 듯한 어머니의 힘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영화는 막연하게 "위대한 모성"이라며 어머니를 찬양하지 않고, 자식들의 갈등을 해소하고 방황으로부터 돌아오게 만드는, 마치 구심력과도 같은 어머니의 힘을 이야기한다. 마냥 자기들의 삶에만 바빠 과거로 회귀하는 건 아무 쓸모없는 일이고 구차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자식들에게도, 사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 시절의 달콤함을 느끼는 것은 삶의 활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라이문다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눈물로 부르는 노래 "귀향"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어머니라고 해도 희생해야 할 것이 많기에 그 뒷모습은 여전히 가슴을 아리게 한다. 유령이 되어 사람들에게 있는 듯 없는 듯 행동해야 하는 영화 속 어머니의 모습은, 어쩌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어머니들의 모습일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들 잘 되라고 한없이 뒷바라지 해주고, 손녀에겐 "엄마에겐 너 밖에 없으니 잘해줘야 한다"면서 행복을 도모하기도 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그림자가 되어 남들 모르게 자식들을 잡아주는 힘을 발휘하면서도, 그림자가 된 만큼 당신이 느끼는 아픔마저도 드러내지 않고 삼켜야 하기에 어머니의 모습은 위대하면서도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 말미에 자식들과 함께 살면 될텐데도 굳이 이웃 여인을 간호하겠다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이렇게 말한다. "유령은 울지 않아." 그러면서 돌아선 채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의 뒷모습. 처음 보고 나서는 몰랐는데 생각할 수록 이 장면이 너무나 가슴에 깊게 파고들어 아려온다. 나의 어머니도, 우리들의 어머니도 거대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 이렇게 수십번 수백번도 눈물을 감췄을 것 같아서, 유령처럼 말이다.
영화 <귀향>은 진지한 척 하지 않아서 그 감동의 농도는 더욱 짙고,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한 척 하지 않아서 더욱 더 깊고 위대하다. 여인들의 한없는 수다처럼 계속되는 대화와 그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번의 웃음을 거치고 나면 어느덧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봉오리가 되어 웅크리고 있던 아프고 또 따뜻한 진심이 활짝 피어나 있다. 이 영화는 여성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아픔들마저도 웃으면서 서로와 나누는 여인들과, 그 가운데에서 그들로 하여금 결코 길을 잃게 하지 않고 늘 잡아주는 어머니라는 존재에게 바치는 헌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참 시시콜콜한 이유로 어머니로부터 점점 흩어지고 멀어지다가도, 결국 우리는 "엄마 없이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을까"하면서 우리 마음의 고향인 어머니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그렇게 고향처럼 평온한 어머니의 존재처럼, 이 영화도 기분좋은 웃음과 서서히 마음을 꽃망울로 물들이는 감동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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