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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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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4 오전 1:2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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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영화를 매우 좋아라하는 사람으로서 하기 참 쑥스러운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이번 <해변의 여인>이 처음이다. 물론부터 이전에서 홍상수 감독의 명성과 지난 작품들, 감독 고유의 스타일이나 영화 속 캐릭터들의 특성같은 건 각종 기사나 정보로 들어왔으나 그걸 정작 영화를 진득허니 보면서 제대로 느껴본 적은 잘 없었다는 말이다. 아마도 그의 영화가 지금까지 모두 18세 관람가였다는 점(<극장전>을 제외한 홍 감독의 모든 작품은 내가 미성년자일 때 개봉했다), 사실적인 베드신이나 '예술영화 대접'에 대한 약간의 부담감 등이 작용했다고 봐야 할까. 그렇다고 해두자.
그런 점에서 <해변의 여인>은 유독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홍상수 감독의 영화다. 이전부터 유독 두드러져 보이는 호화캐스팅에다가 예고편을 통해 봤던 코믹한 대사들도 재밌었고, 홍 감독의 영화 중 최초로 15세 관람가를 받았다는 점도 부담을 조금 덜어주지 않았나 싶다. 유달리 튀거나 하는 제목도 아닌 대중가요를 쉽사리 떠올리게 되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나른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영화에 집중했고, 그 결과 영화는 정말 나른하고 여유로운 영화였다.
나름 알려진 영화감독이지만 작품구상에 고심하고 있는 중래(김승우)는 절친한 후배 창욱(김태우)을 간신히 꼬드겨 시나리오 집필 겸 해서 신두리 해변으로 여행을 떠난다. 창욱은 그 여행에 여자친구 문숙(고현정)을 데리고 오는데, 문숙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중래의 팬이다. 은은한 해변을 앞마당 삼아 망중한을 즐기던 중래와 문숙은 어느 순간 서로에 대한 감정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고, 둘은 창욱 몰래 은밀하게 하룻밤 사랑을 즐긴다. 그리고 다음날, 여전히 설레고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는 문숙과는 달리 중래는 하루만에 갑자기 어딘가 귀찮고 피곤한 듯한 태도를 취하고 둘 사이는 멀어질 듯한 모양새를 하게 된다. 그리고는 중래는 또 다시 커피전문점을 운영하는 선희(송선미)라는 여인과 다시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과연 중래와 문숙은 하룻밤 사랑에서 정말 진지한 사이로 발전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겉으로 보기에는 요즘 들어 많이들 나오는 쿨한 연애를 다룬 로맨틱 코미디와 같은 인상을 주기 쉬운데, 한마디로 말하면 그건 아니다. 그런 영화를 예상하고 봤다간 적잖이 지루해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들의 대사는 나중에 일상에서 써먹고 싶다하는 생각이 들만큼 멋지다기 보다는 뜬금없고 적나라하며, 등장하는 캐릭터들 또한 평면적이다가도 불현듯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뭔가 멋을 부리고 일부러 쿨함을 드러내려 하기보다는 그저 적당히 비굴하고 적당히 이상한 평범남녀들의 일상에 카메라를 들이댔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배우들의 연기 또한 절제 또는 과장이 없이 정말 셀프카메라라도 찍듯이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관객의 정곡을 톡톡 찌르며 재미를 주면서, 시쳇말로 '무심한듯 시크하게' 연기를 해야 할 텐데, 이런 면에서는 배우들의 연기가 모두 만족스러웠다.
단연 돋보이는 두 배우가 김승우와 고현정이다. 김승우는 곧 개봉될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도 여자들을 꽤나 혼란스럽게 하는 남자 역할로 나왔는데(물론 이 영화에서는 한결 덜 나쁘게 보이고 다소 바보스럽고 처량하게도 보인다), 역시나 그 연기가 대단히 능청스러웠다.(!) 작업도 안되고 외로움에서도 헤어나오지 못해 무기력함을 느끼고, 하룻밤 사랑에 혹하다가도 어느 순간 겁먹고 돌아서는, 가벼우면서도 불안정한 심리를 안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잘 보여주었다. 비단 여자 문제로만 고민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철학을 늘어놓기도 하는데, 욕망에 사로잡혀 일부분만 보는 것과 진짜 실체를 보는 것에 대한 일장연설을 하기도 하는 등 자기도 피곤하면서 보는 사람들도 꽤나 피곤하게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잘 소화해냈다. 배우가 한 캐릭터로 굳어지는 것이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여자 문제에 대해 우유부단하게 갈팡질팡하는 가벼우면서도 불안정한 남자의 모습을 연기하는 데에는 김승우가 이제 도가 트이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배우일 수 밖에 없는 문숙 역의 고현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청순가련 여인의 이미지로만 쭉 밀고나가던 그녀가 이 영화부터 곧 방영될 드라마에서는 성인잡지 기자로까지 나온다고 하는 걸 보니 제대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이 영화에서 그녀가 맨 처음 하는 대사가(그 앞에 '이쪽으로 타세요~'하는 '비공식적'인 대사가 있긴 하지만) '왜 X랄이니... 왜 X랄이야...'이니 말 다했지. 이로부터 시작해 고현정은 영화 내내 청순가련 여인과는 거리가 한참 먼, 아무 생각없는 듯, 감정에 충실해 때론 욱했다가도 금방 표정이 밝아지고 또 금방 지쳐버리기도 하는, 다소 주책스럽기도 한 노처녀의 모습을 유감없이 선보인다. 화장기 없이도 고운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큰 키와 큰 얼굴을 '잘라버리고 싶다'고 툭툭 내던지는 그녀의 모습은 기존 이미지를 배반하면서 피식피식거리는 웃음을 꾸준히 선사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 속에서 '무심한듯 시크한' 연기의 최절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욱 역의 김태우와 선희 역의 송선미 역시 능청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나마 가장 모범적이고 준수한 듯 보이는 창욱 역의 김태우는 그러다가 의외로 사소한 것이 끝까지 목숨걸고 미친듯이 달려드는 요상한 캐릭터를 뜬금없이 선보이며 웃음을 준다. 근데 또 그게 자기는 너무도 진지한 태도로 그런 사소한 일에 매달리는 모습이라 더 황당한 웃음을 안겨준다. 활달한 성격의 선희는 작업의 상대인 중래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던짐으로써 더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 기술을 구사하는, 역시나 겉으로는 무심한 척 하면서 속으로 할 건 다하는 능청여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이 영화의 매력은(곧 홍상수 감독 스타일의 매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심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캐릭터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의 묘한 매력과 치부를 드러내면서 현실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중래는 작품구상에 꾸준히 임하면서 구상하는 작품에도 나름 진지한 메시지를 담고, 허상과 실체에 대한 독특하지만 그럴싸한 철학도 늘어놓는 반면, 정작 자신은 여자들과 하룻밤 사랑을 즐기고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가벼운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문숙은 꼭 자야지 애인이 된다, 한번 잔 사람은 애인이니까 쉽게 헤어져선 안된다는 등 꽤 순진한 연애 철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중래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어느 순간 사랑에 대해 바보였던 자신을 조금씩 성장하게 하는 성숙함도 지니고 있는 여인이다. 이들 모두가 절제되지도 않고 과장되지도 않게 현실 그대로인 듯한 말과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런 독특한 성격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그러면서 매력적인 면과 흉한 면은 동시에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처럼 현실과 같이 물흐르듯 흘러가는지라, 보는 사람에 따라서 상당히 지루해할 분들도 꽤 있을 것이다. 뚜렷한 극적 변화나 반전이 없이 영화는 해변으로 여행 온 남녀의 심리 변화를 그저 무심하게 뒤쫓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화는 남녀들의 관계 형성과 해소가 어떻게 진행되고, 갈등이 어떻게 풀어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며 보기보다는, 그런 관계를 통해서 남녀의 심리가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관찰해가며 보는 것이 더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살펴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영화의 촬영을 맡은 김형구 촬영감독은 <무사>, <봄날은 간다>, <살인의 추억>, <괴물> 등 환상적인 때깔을 자랑하는 영화들의 촬영을 담당했던 감독이건만 이 영화에서는 너무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시종일관 멈춰있거나 움직여도 참 게으르게 움직이거나, 아님 다소 옛날스러워보이는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한다. 이것은 아마도 괜히 때깔을 부여해서 서정적이고 영화적인 상황으로 치장하려 하기보다는 홍상수 감독의 지독히 현실적인 스타일을 따라서 마치 다큐멘터리 혹은 몰래카메라라도 찍는 듯 천연적인 질감을 부여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 더구나 영화는 마치 탁자에 얹어놓은 캠코더처럼 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무심하게 찍다가 어느 순간 한 사람이 긴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면 그 사람에게로 눈에 띄게 줌인하면서 어느 순간 그 사람의 표정과 심리를 은연중에 드러내놓는다. 눈에 띄는 비주얼이나 감각을 자극하는 갈등구조는 사람사람의 행동과 심리의 특징에 더 직접적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중래보다는 문숙의 시점에서 영화를 보는 게 더 흥미로울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남성의 시선으로 주로 진행되고, 여성이 상대적으로 대상화되는 편이었다면,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여성의 시각으로 마무리를 한다. 시작은 중래와 창욱의 여행 계획으로 출발해 여전히 남자들의 시각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제목에도 '여인'이 들어가 있듯, 남자들의 심리가 아니라 여자들의 심리가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여성, 즉 문숙과 선희는 단순히 중래를 놓고 휘둘리는 여인들이 아니라,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고 애정관에 있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여인들이다. 단지 우매한 남자들에 의해서 신격화 또는 대상화되는 여성들이 아니라 스스로 상황에 대한 인식을 적극적으로 하고 그에 맞는 적극적 대처를 해나가는 여성들이란 얘기다.
대표적으로 비교를 할 수 있는 사례가 영화 속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개 '똘이'다. 문숙은 이 진돗개 똘이를 볼 때마다 마치 동료라도 만난 듯 친근하고 발랄하게 다가가며 보듬어주고 매만져준다. 그런데 이 똘이라는 개는 처음에는 한 커플을 주인으로 삼아 함께 다니다가 어느 순간 버림받게 된다. 처음 똘이는 매몰차게 떠나는 전 주인의 차를 끝까지 쫓아가며 미련을 보이지만 어느 순간 똘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주인과 함께 있다. 개의 마음이 줏대없이 우유부단하게 옮겨다닌다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 치면 버림받은 과거에 얽매여 마냥 주저앉기 보다는 새로운 삶에 적응해가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똘이의 경우는 영화 속에서 곧 문숙의 경우로 옮겨진다. 문숙은 처음에 중래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지며 수줍게 다가가고 그와 함께 밤도 보내게 되지만, 중래는 하루가 지나기도 무섭게 마음을 싹 바꿔버리고는 딴 여자를 만나고 만다. 문숙은 처음엔 그런 중래 앞에서 '문열어~ 빨리~!!'하며 술주정을 부리면서 대책없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술기운에 못이겨 금새 잠이 들듯 그런 분노의 감정도 사그라든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중래를 향한 감정에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중래의 그럴 듯한 변명과 설명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문숙과 선희(중래의 또다른 여자)가 형성하는 관계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관계라면 문숙이 있던 자리에 시치미 뚝 떼고 들어선 선희에게 문숙은 바로 머리채 잡고 늘어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러지 않는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만나서는, 한 남자를 두고 치정극을 벌이기보다 오히려 같은 여자로서 겪었을 여러 감정들을 공유한다. 술을 마주하며 지난 사랑에 대한 아픈 추억을 털어놓고, 또 그 상처를 다독여주기도 하면서 이들은 오히려 중래가 뻘쭘해질 정도로 돈독한 유대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단순히 사랑을 놓고 극단적인 감정으로 충돌하면서 자극적인 사랑싸움의 면면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보스러울 수도 있을 애정관계의 충돌을 통해 서로 상처를 내고 입기보다는 보다 성숙한 관계로 성장해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여인들이 이렇게 자신들의 과거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오히려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유대를 쌓아가는 동안, 남자들은 여전히 흐지부지하고 불확실한 인간관계 속에서 위태위태한 길을 걷는다. 초반부에 꽤 비중있게 등장했던 창욱은 문숙이 옛사랑 얘기를 할 때마다 툴툴거리기만 하더니 중반 이후부터는 소리없이 사라져버리고 중래 또한 뭔가 긴장감 있게 전개될 것 같은 그와 두 여인 사이의 관계에서 무기력하게 빠져버린다. 여자들이 인간관계의 새로운 변화 속에서 나름의 굳은 유대를 형성하며 변화에 적응해가는 반면, 남자들은 한편으로 과거에 맺었던 관계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 영향인지 지금의 인간관계에서도 안정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인 비교가 될 수 있겠지만,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둘러싸고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 적응력과 성장속도에 대한 이와 같은 남과 여의 비교는 꽤나 흥미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면서는 너무나도 무심하게 물흐르듯 전개되어서 참 자극이 없다, 영화답지 않게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영화를 보고 난 뒤 이러한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와 발전하는 모습을 곱씹어보니 참 흥미롭고 의미있는 구석이 다수 존재하는 영화이지 않았나 싶다. 지루한 그들의 여정을 무심하게 좇다보면 어느새 어떤 이들은 한뼘씩 정서적으로 자라 있는 것이다. 남녀 심리를 사실적이다못해 징글징글하게 표현한다는 홍상수 감독이 이번에도 역시 '관계'를 둘러싼 남녀 심리에 대한 흥미로운 비교이론을 내놓았다. 대신에 이번 영화에서는 여성이 그 적응력과 성장속도면에서 남성보다는 우위에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놓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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