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난 지금보다는 어렸을 때 자동차에 더 관심이 많았던 듯하다. 어린 나이에 흔히 가질 수 있는 시시콜콜한 호기심일지도 모르겠지만, 길거리를 지나다니며 발견하는 차들마다 꼭 상표들을 들추며 기억하고, 그러고 나서는 이런 이름의 차는 이렇게 생겼더라 어느새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것이다. 지금은 귀차니즘의 확산인지 흥미가 사라져서인지 TV에서 나오는 신차들에 대한 광고들을 봐도 그게 그건가 무감각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게 가지는 속도감에 대한 원초적 카타르시스, 그것은 영화와 같은 매체를 통해 볼 때마다 여전히 통쾌함을 느끼곤 한다.(물론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극구 지양한다.)
그래서 이 <패스트 & 퓨리어스> 시리즈(1편은 <분노의 질주>라는 이름으로 개봉했었지만)도 1편, 2편 모두 봐왔다. 사실 카레이싱이라는 것도 한국인 정서엔 그다지 눈에 익지 않은 소재인데 스트리트 레이싱이니 더 낯설 법도 했지만, 온갖 규범과 질서로 가득찬 도시 한복판에서 즐기는 탈규범적인 레이싱이라는 점에서 뭔가 짜릿한 쾌감이 더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눈부신 헤드라이트 너머로 펼쳐지는 레이서들의 아찔한 묘기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그런데 이번 세번째 영화는, "3"이라는 숫자를 붙이는 것도 거부한 채 <도쿄 드리프트>라는 부제를 달고는 뭔가 다른 기술을 보여주러 나왔다. 이 기술인즉, 본인 매우 아이스럽게도 "카트아무개" 게임을 통해서야 제대로 그 실체를 알게 된 "드리프트"이다.
18세 소년 션 보스웰(루카스 블랙)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벌써 전과 2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문제아이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소년원에 들어가지 않고 이혼한 어머니와 거처를 수시로 옮기는 방법으로 잘 버텨왔지만, 학교에서 또 한번 카레이싱으로 주택파손 등 어마어마한 말썽을 부린 것이 발각되자 기어이 소년원에 수감될 위기에 놓인다. 어머니는 최후의 방책으로 션을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일본 도쿄로 보낸다. 위압적인 아버지의 태도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도쿄의 환경 속에서 불편해 하던 션. 그러나 역시 자기와 마찬가지로 차를 사랑하는 트윙키(바우 와우)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또 한번 레이싱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런데 션이 새롭게 접하게 된 레이싱 세계는 지금까지 겪어본 것과는 달랐던 이른바 "드리프트 레이싱"이다. "한"(성 강)이라는 동료를 만나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면서 도쿄의 밤 지하 세계에서 젊음들이 펼치는 은밀한 파티에 재미를 들이게 되고, 그 속에서 닐라라는 이성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러던 션에게도 역시나 위기가 닥쳐오니, 닐라의 현 남자친구이자 야쿠자의 강력한 빽을 자랑하는 "드리프트 킹", 이른바 DK(브라이언 티)가 그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들어온 애송이 정도로 여겼으나 갈수록 느는 실력과 여자친구와의 잦은 만남, 동업자인 "한"의 배신 등으로 DK의 속은 있는대로 뒤집히고, 션과 DK의 피할 수 없는 승부가 점점 다가오는데.
이번 3편이 제작되면서 감독은 물론이요 배우들까지 싹 새로운 얼굴들도 바꿨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1편에서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단박에 톱스타 반열에 오른 빈 디젤은 물론이요, 2편까지 나오던 그나마 우리에게 알려진 폴 워커조차 안나온다. 모두가 낯선 얼굴이고 그나마 팝쪽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트윙키 역의 바우 와우 정도는 아실 터이다.(어렸을 때부터 래퍼로 활동해 온 가수출신 배우이다) 오히려 카메오로 나오는 츠마부키 사토시의 얼굴일 주인공들보다 더 낯이 익으니 뭐 말 다했다. 이런 즉, 이 영화는 배우들의 명성보다는 철저하게 영화가 근본적으로 제공하고자 하는 스트리트 레이싱으로서의 재미에 온전히 의지하겠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배경이나 주인공의 처지도 모두 바뀜으로써 전편들과 차별화하려는 구석이 곳곳에서 보인다. 일단 주인공은 전편들의 형사와 같은 엄연한 "성인"에서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18세 "소년"으로 바뀌었다.(물론 외모상으로 볼 때는 그가 18세 소년이라는 것이 쉬 믿기지가 않았지만) 때문에 전작들이 갖고 있던 뭔가 살벌하고 거대한 스케일은 조금 줄어든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야쿠자와 같은 거대 조직과 정면 승부를 하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는 것 또한 주요 인물들이 엄연한 학생 신분이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또한 배경이 미국 주변에서 일본 도쿄로 확 바뀐 것 또한 흥미로웠다. 영화는 그저 일본을 배경으로만 삼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주인공이 느끼게 되는 이질감으로 초반부에 꽤 재미있게 보여준다. 실컷 안입던 교복(그것도 남자 교복은 6,70년대 우리나라에서 보던 스타일이다)을 새삼 입어야 되고, 미국과는 또 다르게 사람들이 마치 개미떼처럼 북적거리는 도시 한복판을 목격하기도 한다. 또한 미국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렇듯, 일본에서 주인공이 이방인 대접을 받으며 조롱당하는 것도 비슷하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레이싱 대결에 집중되면서 일본 고유의 질감은 점점 무뎌지긴 하지만 말이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 영화에는 헐리웃 영화 치고 꽤 많은 한국계 배우들이 등장한다. 악역 "드리프트 킹"은 영화 속에서 "타카시"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실 이 역을 맡은 배우 브라이언 티는 한국계다. 그리고 션의 실력이 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조력자 "한"을 맡은 배우 성 강 역시 한국계다.(이 "한" 역할의 경우는 영화 속에서 "미국 사람들이 말썽 부리면 멕시코로 튀듯이 내겐 이 곳이 멕시코다"라는 대사를 하는데 여기서 간접적으로 한국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미국 바로 밑이 멕시코이듯 한국 바로 옆이 일본이니까) 또한 또 다른 한국계 배우 레오나르도 남 역시 일본인 카레이서로 조연급으로 나오는 등 여러 한국계 배우들이 나온다는 것이 꽤 반갑게 여겨진다. (한국계 배우면서도 일본인 역할로 나오는 이들이 꽤 있는데, 사실 서양인들이 보면 그 얼굴이 그 얼굴로 보일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선 한국 사람 얼굴과 일본 사람 얼굴은 대번에 구분이 간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계 배우들도 꽤 나오고, 메가폰을 잡은 저스틴 린 감독 역시 곧 <올드보이> 리메이크판을 감독할 거라면서 왜 영화 속에서 "넌 내 선수야. 현대 차로 시합할꺼야?"와 같이 한국 상품을 비꼬는 대사가 나오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옛날같으면 몰라도 요즘은 현대 차가 미국 시장도 일본 못지 않게 조금씩 잠식해 가고 있다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비꼬는 건 아니었나 모르겠다. 더구나 상표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해가면서.
그건 그렇고,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설명해봤자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일 것이다. 역시나 이 <패스트 & 퓨리어스> 시리즈에서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스피드의 본능르 얼마나 확실히 깨우느냐에 있을 것이다. 일단 이 세번째 영화는 그저 스피디한 레이싱을 또 다시 반복해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드리프트"라는 새로운 기술을 중심으로 레이싱을 전개해나간다는 것이 독특하다. 앞에서도 말했듯, 참 아이스럽게도 난 이 드리프트라는 기술을 "카트아무개" 게임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발견했다. 타이어가 타서 닳아질 만큼 바닥에 잔뜩 밀착해 도저히 돌 수 없을 것 같은 커브조차 절묘하게 돌아가는 기술. 그 게임에서는 지극히 아기자기하게 그 기술이 선보여지지만, 이 영화에서는 드리프트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나다를까, 이 드리프트 기술이 들어가니까 카레이싱은 단순히 빠른 속도를 내어 이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이 퍼포먼스가 되었다. 그 둔하고 육중한 자동차를 가지고 원을 그리면서 드리프트를 하질 않나, 범퍼가 벽에 닿을듯 말듯 턴을 하면서 묘기 대행진을 벌이질 않나, 바로 옆이 낭떠러지인 아찔한 도로에서는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하나둘 차례차례 몸을 돌려가면서 마치 사전에 맞추기라도 한듯 빠르면서도 질서정연한 행렬을 이룬다. 이는 흡사 자동차들이 무용, 수중발레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기존 영화들이 선보였던 스피드의 쾌감 역시 충실하게 전달한다. 특히나 후반부 도시 한복판에서 수많은 인파들을 헤치면서 펼치는 추격전이 인상적인데, 이때는 사람들을 교묘히 비집고 들어가 커브를 도는 드리프트 기술도 인상적이고, 북적거리는 도로에서 한 뼘 차이를 놓고 벌이는 총격전 또한 아찔한 재미를 선사한다. 마지막에 펼쳐지는 최후의 레이싱 대결에서도 절벽 도로에서 펼쳐지는 스피드 경쟁이 손에 땀을 쥐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실 이런 영화에게서 스토리의 개연성, 마구 얽혀있는 갈등이나 독특한 주인공의 매력을 기대하는 건 필수라기보다는 선택사항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1편에선 도미니크(빈 디젤)라는 그냥 넘기기엔 너무 아까운 멋진 캐릭터를 발견해 예상 외의 이득을 보긴 했지만, 일단 이 영화가 지닌 1차적인 목적은 스트리트 레이싱의 쾌감을 실감나게 전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도쿄의 화려한 밤을 배경으로 스피드에 대한 본능을 충실히 깨워줌은 물론 드리프트라는 기술을 중심에 둠으로써 속도감 뿐 아니라 예술적인 퍼포먼스까지 상당히 잘 보여주었다. 미국 평론가들의 얘기대로, 이 영화는 다른 곳에 집중하다 이도저도 놓친 게 아니라 "레이싱의 쾌감" 하나에 집중함으로써 그 미덕을 확실히 건진 영화가 아닐까 싶다.
한 마디 더 : 맨 마지막 장면에서 굉장히 반가운 얼굴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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