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솔깃해지는 요즘 최고의 이슈는 [다빈치코드] 다. 이미 수천만권 팔린 희대의 베스트셀러지만 미처 경험하지 못한 이 들에게는 보다 여유있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인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원작이 메가히트 소설이고 원작에 충실한 영화이다보니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관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쯤은 감독 스스로 예상했을 것이지만, 실제로 열린 뚜껑 속의 내용물은 역시 기대한 정도를 넘지는 못한다.
비록 영화는 원작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적당한 친절과 적당한 긴장감을 손에 쥐어주지만 소설 다빈치코드의 수많은 독자들을 새롭게 만족시킬 만한 무언가는 없는 것 처럼 보인다. 사일런스 역의 폴베타니 나 티빙경 역의 이안맥켈런의 연기로 어느정도 캐릭터에 대한 보상이 있을 뿐이다.
다빈치 코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해리포터라는 더 뛰어난 우등생이 있기 때문에 2등이 받는 서러운 혹평을 피하기 어렵다. 해리포터를 읽는 모든 독자들은 상상속에서조차 가늠하기 힘든 비주얼의 세계를 오히려 영화속에서 얻는다. 소설을 제대로 읽은 독자일 수록 도리어 제발로 극장을 찾게 만드는 해리포터의 뛰어난 시각적 완성도와 구현능력은, 소설을 영화화한 모든 영화 들에게 높은 기준선을 그어놓았다.
영화 다빈치 코드는 소설 전체를 가득 채운 미스테리한 코드를 모두 주어담느라 허겁지겁 바쁘다. 주인공은 쫓고 쫓기기도 바쁜 터에 십자군 원정이나 마녀사냥, 그리고 콘스탄틴 대제의 신약성서 집필 등 예수 사후의 사건들을 관객들에게 일일이 말로 설명하느라 참 바쁘고 숨가파 보인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발칙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가슴에 품고 의미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 다빈치코드는 예수를 믿는 모든 신앙인들을 모독하거나 성전의 권리를 비웃을 사탄의 능력을 갖기에는 한참 역부족이다. (영화를 본 신부나 목사들 조차 우려할 수준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어찌되었건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 영화상영불가 가처분 신청을 한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 이다. (한기총이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가 아무리 신성하다 한 들 그것에 물음을 갖는 인간의 상상력 조차 옭아매는 것은 옳지않다. 법원은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니므로 특정 종교집단의 이해관계가 대다수 국민들의 볼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하여 기각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이든 서울시장이 서울을 하느님께 바치고 말고 간에 종교가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세계를 막는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카톨릭 매스컴 위원회 김민수 신부는 신학대를 다니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수없이 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교회의 권능과 절대적 복종하에서는 질문을 가슴에 담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하면서 날이 갈수록 신자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종교적 권위와 신앙이 현실의 삶과 발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종교의 역사가 목숨을 걸고 덮어 두어야 할 만큼 억압과 고통의 그것이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밝혀서 수천년 세월동안 핍박받고 차별받은 영혼을 위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의 신성함에 누가 된다 하더라도 밝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신앙심 깊다는 예수쟁이가 내게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하느님을 무슨 근거로 믿느냐고 또 물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낳았다는 사실을 무슨 근거로 믿냐고.
그러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나를 낳아준 부모를 믿는 것은 그들이 나를 낳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내가 우리 부모의 자식임을 믿고, 또 아무도 의심하지 않듯이
내가 하느님과 주님을 섬기는 것은 그들의 권능과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나를 낳아준 부모를 믿 듯, 그들의 옳은 진리와 사랑을 마음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쟁이는 아무말 없이 내 곁을 떠났다.
Filmania CRO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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