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참 재미있게 읽은 책이 영화로 옮겨진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때론 책이 너무나 감명깊어서 영상화될 때 그 감명을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사실 대다수의 경우, 원작 책을 넘어서는 영화를 꼽기가 상당히 드물기도 하기 때문에) 그래도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머릿 속에서 펼치던 책 읽을 때와는 달리 그 상상이 첨단 기술로 스크린에 그대로 체현된다는 것은 기대감을 북돋기에 충분한 일이다. 나 역시 그래서 중학생 때 <해리 포터> 시리즈가 처음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하루하루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렸고.(<반지의 제왕>은 책은 읽지 않고 영화만 봤다. 1권 초반에 나오는 배경 설명 부분에서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특히나 앞서 얘기한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그 책이 자기만 재미있게 읽은 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 것이라면, 전세계적인 관심과 추측에 저도 모르게 기대치에 물이 오르게 마련이다. <다빈치 코드>가 바로 그런 경우다. 미국에서는 몇년 씩이나 판매순위 상위권을 떠나지 않았고, 우리나라에서도 260만부라는 판매량을 기록한 이 책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흥분한 사람은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정신 못차리고 빠져들어가며 읽었기 때문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반 시사회는 물론 기자 시사회조차 개최하지 않아 기자들의 사전 평가조차 알 수 없었던 이 영화는 개봉 후에야 그 면모를 조금씩 알 수 있었는데, 불안하게도 혹평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러나 일단 내 기대치는 그 혹평에 꺾일 만큼 약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보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보고 난 뒤, 사실 혹평할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은 왠만한 분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소개해드리자면 이렇다. 우리의 주인공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은 세계적인 기호학자이기도 한 하버드대 교수로, 현재 프랑스 파리에 머무르며 특별강연회를 열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중 갑작스런 연락을 받는데,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던 루브르 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 자크 소니에르가 살해당했고, 그가 남긴 암호를 풀기 위해 랭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랭던은 곧장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프랑스 경찰의 브쥐 파슈 국장(장 르노)과 대사관의 암호 해독 담당요원인 소피 느뵈(오드리 토투)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저 암호 조사차 온 줄만 알았던 소피에게서 랭던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데, 그것은 바로 소니에르가 죽기 전 적어놓은 메시지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로 인해 파슈 국장이 랭던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니에르가 남겨놓은 무수한 암호들과 파슈 국장의 추격 속에서, 랭던과 느뵈는 암호를 풀고 이 사건을 타개해 나갈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는데 이 사건의 뒤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원작 소설에 상당히 매력적이고 개성도 뚜렷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제작 얘기를 들었을 때 캐스팅부터가 어떻게 될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지금 이 배우들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살짝 의외인 면도 없지 않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이들이라면 주인공 로버트 랭던의 이미지가 터프하면서도 남성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모험가 인디아나 존스의 이미지와 상당히 흡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뇌하고 진지한 면이 다소 강한 톰 행크스가 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역시나 연기파 배우라 그런지 그의 연기는 무난했다. 호탕한 말투로 시원스런 강연도 하면서도, 폐쇄된 곳만 들어가면 과거의 기억때문에 절로 몸을 웅크리는 복합적 성격의 인물을 잘 연기하지 않았나 싶다. 다만 기존의 톰 행크스에게서 볼 수 있었던 뭔가 포스가 있는 연기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좀 아쉽고, 또 이전에 생각했던 로버트 랭던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미지가 다소 소극적이고 무거운 쪽으로 변한 듯해 그것도 좀 아쉬웠다.
소피 느뵈 역의 오드리 토투 역시 처음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약간 의외였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는 줄리 델피같은 금발의 신비로운 유럽 여인 이미지를 생각했는데(나만 그랬다면 별 수 없지만;) <아멜리에>에서 깜찍발랄하면서도 엽기스런 매력을 보여준 오드리 토투가 극도로 진지하고 신비로운 소피 역을 맡는다는 게 의외였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니, 상당히 잘 어울렸다. 진한 흑발 머리를 한 채 시종일관 뚜렷한 눈빛으로 진지하게 사건에 임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전의 발랄한 소녀같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이 강단있고 줏대있는 여성의 이미지를 새로 만들어놓은 듯했다.(사실 <인게이지먼트>에서 이런 면이 보이기 시작했었다)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어찌 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의 혼란을 겪고, 그 격한 감정을 때로는 격하게 뱉어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다소 어색한 영어발음이 가끔 걸리긴 했지만, 프랑스 배우가 영어하는 게 어색하다고 또 딴지를 걸 수는 없는 일이다.
이외 주목할 만한 포스를 보여준 배우가 있다면, 티빙 경 역의 이안 매켈런과 사일러스 역의 폴 베터니이다. 우리에겐 <엑스맨>의 냉정한 매그니토보다는 인자하면서도 파워풀한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의 이미지로 더 뚜렷이 남아 있는 이안 매켈런은 이 영화에서는 특유의 인자한 이미지 뒤에 꿍꿍이가 뭔지 알 수 없는 복합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다. 역시나 노장 배우의 연륜은 어딜 가지 않아서, 영화 속에선 노쇠한 몸으로 지팡이를 양손에 짚고 다님에도 우렁찬 목소리나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보이지 않는 인자한 듯 의심스런 표정은 카리스마를 발산하기에 충분했다.
알비노(피부, 모발, 눈에 색소가 생기지 않는 증상)를 앓고 있는 사일러스 역을 연기한 폴 베터니가 풍기는 포스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평소 그의 연기부터가 다른 젊은 배우들과는 달리 항상 뭔가 반골 기질이 보이고, 살짝 비뚤어진 매력을 선사했던 그인데, 온 몸과 머리, 눈까지 허옇게 하니 그가 풍기는 포스는 실로 대단했다. 수시로 살인을 행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 죄를 용서받으려는 듯 끊임없이 주님을 찾으며 기도하면서 스스로를 고행의 길로 몰아넣는, 어두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지닌 사일러스의 캐릭터는 폴 베터니의 선굵은 연기에 힘입어 한결 강렬한 캐릭터로 자리잡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그런 파괴적이고 어두운 이미지에 힘입어 독특한 여운을 남기지 않았나 싶다.
이외에 파슈 국장 역의 장 르노나 아링가로사 주교 역이 알프레드 몰리나 등의 배우들도 이름값에 걸맞는 무난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글씨로만 접하던 책이 영상으로 옮겨진다면, 대중들이 기대하는 건 역시나 머리 속으로 상상하던 책 속 장면들이 어떻게 시각화되는가 하는 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빈치 코드>는 그 중요성이 더 강조되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사건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 각종 미술품, 건축물에서 발견되는 암호나 상징이고, 이는 직접 눈으로 보고 연구해봐야만 그 오묘함을 더 절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기대에 비교적 충실히 부응한 듯 싶었다.
실제로 가보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그저 머리 속에 지도만 그려보는 게 최선이었던 루브르 박물관은 영화 속에 그 내부가 상당히 자세하게 등장하면서 탐사하는 묘미를 제공했다. 현대적인 피라미드의 아름다움과 내부의 고전미가 공존하는 분위기에서, 잔혹한 살인사건이 그 한 가운데에 일어나고 그 주위를 오묘하고 신비로운 빛깔의 명품 그림들이 감싸고 있는 것을 영상으로 직접 목격하니 신비로운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또한 영화 속에 숱하게 등장하는 애너그램(글자의 위치를 바꿔 말을 바꾸는 일종의 퍼즐)이나 그림 속 암시과 같은 암호들이 각종 그래픽 기술에 힘입어 실감나게 포착되고, 재배열되는 모습 또한 우리의 상상력에 가속도를 붙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이전까지는 <최후의 만찬> 그림을 주의깊게 보지 않았고 다만 그 형태만 대략적으로 기억했던 사람으로서, 영화 속에서 인물들의 의상이나 위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숨겨놓았다는 암시 등을 직접 비주얼로 증명해 낼 때 책으로 읽을 때와는 또 다르게 "오, 저런 면이 있었구나"하고 무릎을 치기도 했다. 또한 영화 속에서 랭던이 상상하는 것을 실제 사물에 덧대어 오버랩하는 장면들도 환상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게 꽤 인상적이었고. 이처럼, 시각적인 암호나 퍼즐, 미술품이나 건축물 등 눈으로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원작소설이어서 그런지, 영화가 보여준 이러한 요소들의 시각화는 영화 보는 재미를 더 쏠쏠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암호나 퍼즐 말고도, 원작에는 기독교의 역사를 둘러싼 매우 복잡한 서술들이 등장한다. 때문에 책을 읽기만 해도 더 자세한 배경지식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영화는 어느 정도 한계를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나름대로 랭던이나 티빙의 설명에 재연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이해를 도운 것은 흥미로웠지만, 이해가 안되면 몇번 곱씹어 읽어볼 수 있는 책과는 달리 인물들의 입에서 일사천리로 설명이 진행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자칫 한눈을 판다거나 딴짓을 하면 극의 중요한 흐름의 기원이 되는 설명을 놓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나는 그래도 원작을 읽었기에 영화를 보면서 그런 설명을 듣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지만, 만약 책을 전혀 안읽어보고 대강의 줄거리만 알고 보시는 분들이라면 이 부분에서 특히나 주의를 하셔야 할 듯 싶다.
너무나 많은 비밀들이 폭로되는지라 마치 하나의 대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극이 전개되는 시간은 만 하루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소설도 무척이나 긴박감 넘치게 극 전개가 이뤄졌는데, 영화도 그 긴박감을 어느 정도 살린 것 같았다. 랭던과 소피의 도망과 파슈 국장, 다른 한 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일러스와 오푸스 데이 측의 추격 등 영화가 소설 속 극의 전개와 상당히 유사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긴박감도 일정량 살릴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음악도 분위기에 맞게 적당히 쿵쾅거려주어서 그 분위기를 더 살려주었고. 후반부에 밝혀지는 반전과 비밀 또한 상당히 파괴력이 있어서 책을 읽긴 했으나 읽은지 2년이 지나서 세세한 내용은 가물가물한 나에게는 또 한번 새로운 충격이 되었다. 물론 책을 읽은 이들 중 대다수는 결말과 전개를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극이 전개되면서 느끼는 긴박감이나 스릴이 상대적으로 덜할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이런 경우에는 머리로 상상했던 책 속 장면들이 어떻게 영화를 통해 멋지게, 실감나게 체현되었는가 살펴보는 재미가 주된 재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시가 바쁘게 극이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호흡을 조절하는 데 약간의 실수가 있는 것 같아 조금 아쉽기도 하다. 암호를 밝히고, 음모를 알아내는 과정은 스피디하게 전개하다가 후반부에 첫번째 비밀(뒤에 두번째 비밀도 있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자세한 건 말할 수 없다)이 밝혀지고 난 뒤에는 그 비밀의 의의를 강조하려는 듯한 부분이 다소 길게 전개되어서 후반부에 가서 살짝 지루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랜섬>을 통해서 범인이 뻔히 나와 있는 스릴러가 이리도 긴장감 제대로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론 하워드 감독이 이 영화에서는 스릴러 감각이 살짝 무뎌진 듯해 조금 아쉬웠다.
이 영화가 지금 와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베스트셀러라는 점보다는 한기총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이후로 불거져 나온 영화의 소재에 관련된 논란으로 인한 점이 더 클 것이다. 맞다. 사실 이 영화 상당히 파격적인 설정을 안고 있고, 이것이 영화 내내 사건의 중요한 키포인트로 작용하며 예고편이나 광고에 나오는 말마따나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설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도 그렇고, 대다수의 사람들도 그렇고 이것이 정말 숨겨져 있던 진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오,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겠다"하는 파격적인 호기심만이 들 뿐. 누구 말마따나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이들은 관객들에게 상당히 발칙한 재미를 선사한다. 기존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거대한 믿음에 정말 파격적인 태클을 걸고 있고, 이게 정말 세계적인 논란이 될 만한 태클이긴 하나 그 파격성에 오히려 한번쯤 귀가 솔깃해 봄직한 재미를 이 영화는 주고 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들, 미술 작품들, 역사에 "사실은 이런 비밀이 숨어 있는 거 아닐까?"하는 일종의 음모론을 제기해봄으로써 "허무맹랑함"과 "그럴듯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이런 재미는, 솔직히 거부하기 힘든 독특한 매력임은 분명하다. 베스트셀러를 영상으로 옮긴 영화들이 흔히들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원작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낀 강한 긴장감이나 충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책과 더불어 이 영화가 던지고 있는 발칙한 가정, 이에 따른 인물들의 아찔한 운명의 사다리 타기는 아마도 영화관에서 즐기기에 충분한 재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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